나무의 시대 1490년 경 (티리온, 멜코르의 저택)
(멜코르x핀골핀)
발라 멜코르, 그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자였다. 웃음을 지우는 법 없는 사내였지만, 아버님과 형님의 주위를 얼쩡거리는 게 탐탁지 않았다. 그런 자가 제 발로 내 저택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아내에게 손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응접실로 내려가자 푸른 로브를 차려입은 그가 있었다.
"놀로핀웨공께서도 제 저택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안부 인사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어 바로 용건을 말해달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하려 왔나 했더니 곧 그의 저택에서 무도회가 열린다고 했다. 남들을 만나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춤을 추는 자리에는 흥미가 없었다. 더욱이 별다른 친분 관계도 없는, 외려 피하고 자임에야. 그의 초대를 거부하는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런 자리에는 제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돌려 말했지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내 손을 맞잡아 왔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가족이나 친척도 아닌 자가 손을 붙잡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입을 열었기 때문에 나는 잠시 동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놀도르 대왕이자 놀로핀웨공의 부친이신 핀웨님과 형님 되시는 쿠루핀웨공도 함께 하는 자리인데, 정말로 오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에 까다로운 이복형까지도 참여하는 자리인 모양이었다. 순간 마음속에 작은 망설임이 생겼다. 무도회라. 어쩌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계시는 자리라면, 평소의 모습이 아니라 한껏 차려입은 형님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주쳐봤자 형님은 빈정거릴 뿐이겠지만, 어쩐지 기대가 되었다. 어딘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돌아오는 것은 거친 대우뿐이었는데도, 그를 머릿속에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아버님과 형님까지 참석하시는 자리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변변치 않은 자의 초대인데, 기꺼이 응해주셔서 그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지요."
태연스러운 태도로 보건데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제 아무리 발라라도 핀웨 대왕과 페아나로 형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거짓을 고할 리는 없었다. 그렇게 까지 해 가며, 나를 그의 저택에 부를 이유는 더욱이 없었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보나마나 멜코르는 막내인 피나르핀에게도 갈 텐데, 동생의 성격상 상대의 청을 들어줄 가능성이 높았다. 무리한 것도 아니니 더욱 그럴 것 같았다. 아버지에 형제들까지 모두 참석하는 자리에 나만 가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도 빠질 수는 없겠군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그를 보기 위해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결정을 하고나자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곁이라면, 얌전한 모습으로 있어줄 것이다. 말끔히 정돈된 머리카락과 꼭 맞춘 듯한 예복을 갖춰 입은 형의 모습을 떠올리자 이상할 정도로 두근거렸다. 성격과는 별개로 아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엘다르라는 불리는 나의 이복 형제였다.
"놀로핀웨공께서도 자리를 빛내주시겠다니 영광입니다."
내 손을 놓은 그는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예를 표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의심의 마음은 접어두기로 했다. 잠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도로 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여차하면 인사만 하고, 바로 남들 속으로 숨어버리면 되었다.
무도회 날이 되어 멜코르의 저택으로 향하니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가면을 쓰고 있었다. 참석자에서부터 시종들에 이르기까지. 색색깔의 가면들이 가득한 저택의 풍경은 무척이나 기이한 것이었다.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몰랐다. 모두가 익숙한 자들일 텐데도 전혀 익숙하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 나만이 가면을 준비해가지 못했다. 미리 전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식으로 보내진 초대장에는 특별히 준비해 오라고 한 것이 없었다. 저택의 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여분으로 준비되었던 가면을 받았다. 흰색 가면에는 금박 장식으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요란스러운 장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거울에 비추어 보니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내 가면과 같은 가면은 하나도 없었다.
형은 아버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내 앞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웃음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 웃음이 소름끼치게 들렸다. 붉은색 가면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무척이나 기뻐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보였다. 무도회였지만, 춤은 추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다행인 점도 있었다.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자리라면, 왕의 차남이라는 위치 때문에 내키지 않아도 몇 명의 손은 잡아야 했을 것이다. 정성껏 준비된 음식들이 가득했지만,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와인이 담긴 잔이 눈에 들어왔다. 우두커니 서있기만 하려니 다리가 아파서 구석진 의자에 잠시 앉았다.
"아라카노."
와인을 홀짝이고 있으려니 형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무슨 시비를 걸러왔나 싶었다. 저택에 들어오는 내 모습이 거슬렸을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게 문제였다. 아차하는 순간에 계단 아래의 어두운 틈으로 끌어당겨졌고, 상대가 재빠른 동작으로 가면을 벗겨냈다. 그리고 내 입술에 다른 이의 온기가 겹쳐졌다. 별다른 동작도 없이 천천히 맞대고만 있었다. 평소처럼 거칠게 깨물지 않는 게 수상했다.
다정한 입맞춤은 기대한 적도 없었지만, 이복형은 언제나 상처를 내려는 듯 사납게 입술을 맞대어 왔다. 그것은 침대 위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가끔은 이렇게 계속 깨물리다가는 입술이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입을 맞추고 싶으신 겁니까, 제 입술을 깨물고 싶으신 겁니까."
한 번은 불만섞인 목소리로 항의해 본 적도 있었더랬다. 말하자마자 바로 후회하고 말았지만.
"아내에게처럼,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맞춰주랴?"
지독히도 쌀쌀맞으면서도, 눈을 떼기가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조소가 돌아왔다. 그게 쿠루핀웨 페아나로였다.
"이제 당신은 제 마법에 걸렸습니다."
입술이 떨어졌다. 내 귀에 들려온 건, 특이한 목소리였다. 아만의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독특한 음색이었다. 상대는 내가 쓰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가면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대리석 바닥이 조용히 울렸다. 가면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상대의 얼굴에 씌워져 있는 가면은 아까 보았던 형님의 가면이 아니었다.
새카만 가면에는 은박 장식이 요란했다. 문 앞에서 나를 맞이하던, 저택의 주인이 쓰고 있던 가면이었다. 내게 주어진 가면과는 색만 다를 뿐 동일한 형태였다.
"당신과 저는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겁니다.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라카노."
그가 흐트러진 가면을 고쳐 썼다. 나는 그가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쫓아가서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어안이 벙벙해서 왜 그의 저택에 찾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입술에는 아직도 와인의 포도향이 어른거렸다. 그가 발리노르에서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였다.
※
뜬금없습니다. 멜코르와 핀골핀이 조우하는 명장면이 있는데 왜 엉뚱한 장면을 써 버리게 되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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