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1시대 20년 경(히슬룸, 바라드 에이셀)
(핀골핀+글로르핀델)
핀골핀 왕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생각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황금꽃 가문의 영주인 글로르핀델이었다. 아직 환복을 하지도 않아서 바로 들어오라 일렀다. 모습을 드러낸 금발 머리의 청년은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만큼 그는 앙과 허물없는 사이였다.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친형제처럼 지내서 종종 이런 식으로 만나기도 했다.
"네브라스트로 갈 생각이라 들었다."
히슬룸에 지내던 핀곤과 투르곤, 아레델은 각각 도르로민과 네브라스트로 향할 예정이었다. 먼저 핀골핀의 큰아들인 핀곤이 얼마 전에 도르로민으로 떠났고, 이제 작은 아들과 고명딸이 네브라스트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투르카노를 따라 갈 생각입니다."
글로르핀델은 왕의 앞인데도 스스럼없이 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이였다면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핀골핀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리 일렀는데도 둘이 있을 때면 아만에서 친근하게 부르던 버릇이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없는 자리라서 일단 넘기기로 했다.
"그래, 너는 늘 그 아이를 친형제처럼 아꼈으니까."
"하여 서운하십니까?"
금발의 청년은 왕의 얼굴을 살폈지만, 핀골핀의 얼굴에 별로 섭섭하다는 기색은 없었다. 왕은 크게 웃거나 크게 슬퍼하는 일이 없었고, 대개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로르핀델의 마음만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괜히 심통이 나서 자신이 볼을 살짝 부풀린 것도 몰랐다.
"아니다. 너라면 믿을 수 있지. 장난기만 좀 가라앉히면 괜찮을 텐데."
곧 핀골핀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떠올랐다. 왕의 앞에서 저런 얼굴을 보이는 글로르핀델이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커버렸는데도 가끔은 부산스레 뛰어다니던 금발의 소년이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대왕께는 제가 아직도 어린 소년으로 보이시나 봅니다."
그런 왕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글로르핀델이 작게 키득거렸다. 청년이 어렸을 때부터 핀골핀은 이미 성년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은 귀여운 막냇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넌 내 동생보다도 어리니 당연하잖느냐."
"그야 그렇지요. 아마도 네브라스트로 떠나면 당분간 찾아뵙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핀골핀의 말을 능청스레 넘긴 글로르핀델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마치 소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투르곤을 따르기로 한 여덟 명의 영주 중 한명이었다. 그가 맡을 일이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겠지.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을 거다."
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쩌면 상당히 오랫동안 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아라카노. 제가 당신의 가문을 따라 망명을 떠난 것과 당신의 아이들을 아끼는 건, 당신을 경애하기 때문입니다."
간만에 들어보는 이름에 왕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글로르핀델의 부모들은 아만을 떠나지 않았고, 그만이 핀골핀 가문을 따라 가운데 땅으로 오게 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핀골핀 가문에 애착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투르카노는 왕을 많이 닮았습니다."
큰 아들인 핀곤보다도 핀골핀의 차분한 외모와 성품은 작은 아들인 투르곤이 많이 물려받았다.
"내 아들이니 당연히 나를 닮았겠지."
"제가 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왕을 보는 것 같아서 자꾸 눈길이 갑니다."
비록 장성한 모습 밖에 보지 못했지만, 글로르핀델은 왕의 어린 아들을 볼 때면, 가끔씩 어린 시절의 왕도 저러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다. 투르곤처럼 집 안에 머무르기 보다는 밖에 나가기는 했겠지만, 책을 넘기는 진지하면서도 어린 눈망울에서 핀골핀의 어린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더 많구나."
"대왕은 강한 분이시고, 제가 곁에서 지켜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떠나게 된 겁니다."
이복형제인 페아노르처럼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글로르핀델에게 왕은 누구보다 강한 자였다. 굳건하고, 다른 이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의지가 되는 군주였다.
"잘 생각했다. 나는 걱정할 것 없어. 투르카노나 잘 챙겨주거라. 그 녀석이 말은 안 해도 빙하에서 제 아내를 잃은 뒤로 추운 이 땅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따뜻한 서쪽 해안으로 가는 건 잘 된 일이다."
온화했던 서쪽 땅과는 다르게 핀골핀의 무리가 정착하게 된 히슬룸은 겨울이 되면 상당히 추워졌다. 겨울이 시작되려 하면, 투르곤은 외투로 몸을 꽁꽁 감싼 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녕히 지내십시오. 나의 왕이시여. 아라카노의 늠름한 모습을 한동안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아쉬운데요?"
"또 그런 소릴. 엉뚱한 소리는 그만하고 빠트린 것이 없는지 다시 잘 살펴보거라. 미리 길을 다 봐 두었다고 하더니 막상 숲에 들어가서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느냐."
글로르핀델은 아는 길이라고 하면서 핀골핀을 엉뚱한 길로 가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번 숲 속을 헤매면서 소년에게 뭐라고 하려다가도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달아나 버려 곤란했던 핀골핀이었다.
"옛날 얘기입니다. 왕이야말로 이릿세와 산책을 나가셨다가 저와의 약속을 잊으신 적도 있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딸애가 워낙 이리저리 뛰어다녀서 그렇지."
핀골핀의 고명딸인 아레델은 남자 형제들 못지않게 활기찼고, 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글로르핀델과 사냥을 가기로 약속했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생각이 난 적도 있었다.
"하하, 여전하십니다. 곤란한 표정의 대왕을 보는 건 늘 재미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못된 버릇이야. 참으로 건방진 영주일세."
글로르핀델의 말에 핀골핀이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짓자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엄숙한 얼굴이 청년의 말에 흐트러질 때면, 실로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핀골핀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약간의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버릇없는 글로르핀델은 이만 물러가 보지요. 떠나기 전에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투르카노를 너무 놀리지는 말고, 내색은 안 해도 생각보다 섬세한 아이니까."
계속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글로르핀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핀골핀은 혹시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짓궂게 굴지 않을까 주의를 주었다.
"명심하도록 하도록 하지요. 왕의 아드님인데 제가 잡아먹기야 하겠습니까."
"입버릇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겠구나. 영주라는 자가 그렇게 경박해서야 되겠느냐."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평소의 핀골핀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글로르핀델과의 격의 없는 대화에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그 정도로 둘 사이는 가족처럼 친밀하게 보였다. 험한 빙하 속을 함께 헤쳐 나와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
제안의 설정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두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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