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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펜로드] 집무실로부터의 탈출

 

 

"폐하, 잠깐 밖에 안 나가실래요?"

글로르핀델은 오늘도 집무실의 주인이라도 된 양 안락의자에 앉아 투르곤 쪽을 보고 있었다. 막상 방의 주인이자 왕인 투르곤은 몇 번 사용해 본적도 없는 것이었다. 가죽과 원목으로 된 안락의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밖에 나가는 것보다는 의자에 몸을 기대어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왕에게는 처리할 일이 많았다.

 

"됐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잔뜩 기대에 부푼 그의 말에도 왕의 말은 단호하기만 했다. 벌써 몇 시간째 그런 모습이었다. 왕이 서류더미를 하나씩 옆으로 내릴 때마다 반복적으로 글로르핀델이 말을 걸고, 왕이 대답을 하는 식이었다.

 

"오늘 안에 꼭 다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어린아이처럼 실망한 표정이었다. 금발을 의자 뒤로 늘어트리고 있던 그가 드디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와서 책상을 탕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쳤다.

 

"매일 그런 식이지 않습니까. 심심하니 놀자는 거란 걸 압니다."

왕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깃펜을 들어 섬세한 글씨체로 서명을 했다. 글로르핀델은 안중에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매도하지 마십시오. 이래 뵈도 폐하의 충성스러운 영주가 아닙니까."

책상을 돌아 왕의 옆으로 다가온 그가 투르곤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투르곤은 역시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나하나 대응해 주면 성가신 일만 늘 뿐이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알겠습니다. 일단, 밖에서 기다리시죠."

 

집무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누누이 일러도 글로르핀델은 어떻게 해서든 들어오려고 했다. 막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쯤 되면 슬슬 포기할 법도 할 텐데, 그는 도무지 포기란 걸 몰랐다. 왕의 시녀들도 왕을 위해 준비해 온 다과를 글로르핀델이 주섬주섬 먹고 있는 모습이 익숙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풍경이랄까. 오히려 그가 연무장에 나가 찾아오지 않는 날이면 시녀들이 집무실을 기웃거릴 정도였다. 눈부신 금발의 영주를 사모하는 시녀들이 제법 되는 탓이었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시녀들에게도 꽃같은 웃음을 보여주는 잘생긴 영주를 싫어할 시녀들은 거의 없었다.

 

"글로르핀델, 또 여기 있었습니까?"

 

정갈한 발소리와 함께 날카로우면서도 기품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동시에 두 가문의 영주자리를 겸하고 있는 펜로드의 것이었다. 왕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그가 글로르핀델쪽으로 살짝 눈을 흘겼다. 백성들에게는 마냥 온화한 그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면 놀랄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영주들에게는 상당히 엄격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주로 언성을 높이는 대상들 중 하나는 이곳에는 없지만, 영주들 중에 어린 제비 가문의 영주 두일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황금꽃 가문의 영주인 글로르핀델이었다. 아마도, 곤돌린에서 그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면, 둘 중의 하나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영주께서는 왜 또 폐하의 집무실에 계시는 겁니까."

글로르핀델은 훼방꾼이 들어온 게 못마땅한 듯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을 펜로드를 응시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그의 시선에 펜로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말이 왕의 앞에서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인 것 같았던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마치 그대는 용무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투르카노, 아니다 폐하를 보러 왔습니다만."

 

그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에 펜로드가 이마를 짚었다. 곤돌린의 왕이 막내 동생이라도 되는 양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가 영주가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왕국 내에서 왕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는 것은 공주인 아레델과 영주들 중에 가장 연장자인 갈도르, 그리고 글로르핀델 정도가 전부였다. 앞의 두 명이 부르는 것 까지 뭐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글로르핀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 또 그런 식으로 폐하의 존함을 마구 입에 올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 안 됩니까? 뒤에 폐하라고 붙였는데요."

 

뻔뻔스러운 그의 태도에 펜로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철이 들 줄 모르는 친우를 어찌해야 좋을지. 따지고 보면, 글로르핀델이 펜로드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는 왕의 형인 핀곤보다도 손위였고, 펜로드는 왕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글로르핀델에 비하면 한참 어렸다. 이미 수천 살도 넘은 그들에게 단순한 나이 비교야 별 의미가 없었지만.

 

"폐하, 글로르핀델이 계속 특별한 용건도 없이 드나들게 두실 생각이십니까."

글로르핀델과 더 얘기를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펜로드가 참다못해 투르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왕 역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기어코 이 꼴이 난 것이다. 상대가 그나마 펜로드여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시녀들 앞이기라도 했다면, 왕의 체면이 땅에 곤두박질 쳤을 뻔 했다.

 

"저도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도무지 듣질 않는 걸 어쩌겠습니까."

펜로드는 왕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가지고 오면 늘상 볕 좋은 창가에서 놀고 있는 글로르핀델이 눈에 띠어 괜히 한 마디 해 본 것이었다. 제멋대로인 영주에게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펜로드보다는 왕 쪽일 것이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제가 데리고 나가도록 하지요. 일단, 이것부터 받아주십시오."

작게 한숨을 쉰 펜로드가 투르곤의 팔에 서류더미를 안겨주었다. 눈의 탑 가문과 기둥 가문의 올해 예산안이라고 했다. 그는 가급적이면 빨리 결재해 달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펜로드가 왕에게 인사를 올리고 뒤돌아서서 글로르핀델의 쪽으로 다가왔다. 붙잡고라도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먼저 펜로드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하필이면 저렇게 서류 더미를 들고 오시는 법이 어디 있나요."

"애도 아니고 왜 이러십니까. 폐하를 방해하는 건 그만두시고, 저와 함께 나가시지요."

그는 글로르핀델의 팔을 잡아끌었다. 물론, 금발의 영주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펜로드도 힘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곤돌린에서도 무술이라면 손에 꼽힐 정도인 글로르핀델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왜 이러십니까. 볼일도 없으신 것 같은데."

잠시 동안 실랑이가 벌어지고, 억지로 데려 나가는 걸 포기한 그가 글로르핀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폐하와 저는 혈육 같은 사이인데 이 정도도 안 됩니까."

어깨에 올린 손을 치우는 그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백전백승. 직접 세어본 적은 없었지만, 펜로드가 글로르핀델의 뜻을 꺾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말인즉 그의 입만 아픈 잔소리였다는 뜻이었다.

 

"공과 사는 제발 구별하십시오. 글로르핀델. 공과 폐하의 관계를 모르는 영주는 없습니다만, 집무실에까지 들어와서 이러는 건 예의에 어긋납니다."

펜로드는 마지막 말을 마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어코 글로르핀델이 지지않고 한 마디를 더 했다. 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지만, 이미 뱉어낸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아주 누구랑 똑같으십니다."

그의 말에 투르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는 결코 아니었다.

 

"글로르핀델, 혹시 그건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생긋 웃는 왕의 얼굴을 본 펜로드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왕은 인자했지만, 그가 저런 식으로 웃을 때는 대개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는 의미였다.

 

"맞습니다만."

그러나 역시 글로르핀델이었다. 가시 돋친 투르곤의 말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싱글거렸다. 둘 사이에 낀 펜로드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다가 황급히 왕의 집무실을 나갔다.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죠."

"투르카노랑 똑같다고 했지요. 아아, 어릴 때부터 투르카노랑 어울리게 두는 게 아니었어요. 누가 보면 펜로드가 왕의 친형제인줄 알겠습니다."

 

펜로드가 나가자마자 그는 바로 존칭하나 없이 왕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보통이라면 당장이라도 시종들의 팔에 붙들려 끌려 나가야 했겠지만, 그가 왕에게 이렇게 구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왕이 왕위에 오르기 한참 전부터 익숙해진 호칭은 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왕도 친근하게 자신을 부르는 그가 싫지는 않았다. 아버지 같은 갈도르와 누이를 제외하면, 이정도로 친밀한 관계인 영주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투르곤이 글로르핀델 쪽으로 걸어오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왕의 키가 영주보다 한 뼘정도 커서 자연스레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왕의 키가 더 컸어도 글로르핀델은 전혀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요."

능글맞게 웃은 그가 제 이마를 누르는 왕의 손가락을 떼어내더니 그대로 왕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상치 못한 동작에 중심을 잡지 못한 투르곤이 글로르핀델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다가 서로의 발이 엉켜서 그대로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밑에 깔린 글로르핀델은 부딪힌 곳이 아프지도 않은 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이러십니까. 다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했을까 걱정스러운 눈길로 글로르핀델을 바라보던 왕은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그대로 있을 수는 없어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왕을 품 안에 가두고 놓아 주지 않았다.

 

"이런 투르카노라서 아주 귀여운걸요."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말하는 통에 듣는 왕 쪽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방음이 비교적 잘 되는 집무실이었는데도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아주 나쁜 취미를 가지고 있다니까요."

투르곤은 쑥스러워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글로르핀델은 옆으로 돌려진 머리를 붙잡고, 왕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길쭉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는 그곳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왕이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목에 닿은 그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펜로드가 가져온 것만 다 하고 나면, 상대해드릴테니 나가있으세요."

손을 들어 글로르핀델의 머리를 밀어낸 투르곤이 글로르핀델의 손에 조금 엉켜버린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물론 금방 끝낼 수 있는 분량은 아니었으니, 사실상 내쫓겠다는 말과 같았다.

 

"폐하, 이렇게 절 내보내고 나면 며칠 동안 안 나오실 생각이신 거 다 압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투르카노에 대한 거라면 뭐든 잘 알고 있어요."

투르곤은 때때로 안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이고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왕의 집무실인지라 간단한 요깃거리나 잠시 눈을 붙일만한 가구들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 있지만 않는 거라면 큰 무리가 없었다. 그것은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그가 취하는 방식이었다. 방해꾼은 주로 글로르핀델이었다.

 

"이 손 못 놓습니까."

 

왕은 영주의 손에 붙잡힌 두 손을 빼내려 했지만, 글로르핀델은 왕을 질질 끌고 마침내 바라던 밖으로 나왔다. 서류뭉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왕을 들어 올려 빙빙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몇 대 맞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 전날 왕이 세워둔 시간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꼼꼼한 성격의 왕은 전날 계획했던 일을 모두 마치지 않으면 잠자리에도 들지 않는 성격이었고, 글로르핀델의 손에 이끌려나와 놀다보면, 순식간에 밤이 되어 있었다. 지친 채로 집무실에 돌아오면,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틀어박혀서 일처리만 하는 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떨 때는, 밖에 나갔다가도 기어이 다시 따라 들어온 글로르핀델은 간이침대에 누워 먼저 잠이 들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다보면 방해라도 하고 싶어졌지만,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 잠자코 손을 빠르게 움직일 뿐이었다.

 

"폐하 납치 성공! 펜로드 퇴치 성공!"

"누가 듣겠습니다."

신나서 외치는 글로르핀델의 입을 투르곤이 얼른 두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진중한 펜로드와 쾌활한 글로르핀델은 매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거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애 같은 글로르핀델을 펜로드가 타일러 보려다가 실패하는 쪽이었지만. 정말로 그들이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왕도 그들의 말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는 편이었다.

 

"농담인데 왜 그러십니까. 아무튼 이왕 나오셨으니까, 이제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어차피 오늘 안에 일들을 다 하기는 틀린 것 같군요. 새벽까지 해야 할 테니까요. 이러다가 제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책임지실 겁니까."

"저는 그 편이 더 좋은데요? 늦게까지 끌고 다녀야겠습니다."

"글로르핀델!"

그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챈 왕이 글로르핀델의 뺨을 잡아당겼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연신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 아무튼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날도 좋은데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요."

"저는 안에 있는 것도 불만없었습니다만, 이번 한 번만입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쪽도 듣는 쪽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왕의 손을 붙잡은 금발의 영주는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복도를 달렸다. 시녀들과 시종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근엄한 모습의 왕이 그보다 작은 영주의 손에 붙들려 끌려 다니는 것은 매번 보아도 신기한 일이었다. 글로르핀델의 발이 얼마나 빨랐던지, 따라가는 투르곤 쪽이 바쁠 정도였다. 긴 소맷자락이 왕이 움직일 때마다 팔랑거렸다.

 

 

펜골로드에 이어 이제 펜로드까지 등장했습니다. 신군 커플은 여전히 자기들만이 세상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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