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별똥별 (수정 中)

 

 

오늘도 곤돌린의 왕은 별이 총총하게 박힌 밤까지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잠자리에 들어도 아무도 그를 탓하는 자는 없었지만, 왕은 자신을 휘몰아치는 편이어서 보통은 새벽녘이 되기 전에는 잠드는 일이 드물었다. 자정도 지난 시간에 글로르핀델은 왕의 침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복도를 오가는 시종들도 적거니와 비밀통로를 통해 들어온 것이라 그가 들어오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문을 대뜸 열어젖힌 그는 창가에 안아있는 왕에게 달려왔다. 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금발의 영주가 왕에게 달려오는 일은 흔하다 못해 일상적인 일이었다. 막상 침의로 갈아입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아 챙겨온 일들을 하던 참이었다.

 

부둥켜 안으려는 글로르핀델을 책으로 밀어낸 투르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쩔수 없이 글로르핀델도 왕의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은 아쉬웠지만, 일에 몰두하고 있는 왕의 옆모습을 보는 건 충분히 즐거웠다.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를 응시하는 눈이나 책상 위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넘길 때마다 드러나는 목선 같은 것들에서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의식 중에 손이 왕에게 향한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투르곤은 별 반응이 없었다.

 

"별똥별이 떨어집니다. 폐하."

 

그들은 창가에 있었는데, 창 밖으로는 남색으로 변한 밤하늘이 있었다. 왕의 침실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었다. 산맥 너머로 보이는 티끌하나 없는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달과 별만이 있는 하늘에 갑자기 길게 선을 그리는 것이 있었다. 별똥별이었다. 글로르핀델이 그것을 보고 투르곤의 어깨를 쳤다. 그래도 투르곤은 담담하게 대답을 할 뿐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떠는 그라서 일일이 반응을 해 줄수는 없었다. 

 

"그래. "

"아무 소원도 안 비실겁니까?"

 

이미 몇 천살씩이나 먹고서 아이들처럼 별똥별에 소원을 빌자고 하는 글로르핀델을 왕이 슬쩍 돌아보았다. 금발의 요정은 당연한 말을 했는데 왜 보냐는 듯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의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그의 평소의 모습과는 참으로 달라서 투르곤은 마음속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다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왕이 웃기라도 하면, 글로르핀델은 왜 웃는거냐고 하면서 대화가 길게 이어질 것이다. 슬슬 가져온 일도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은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내가 왜..."

"보세요. 또 떨어집니다."

 

왕은 창을 등지고 있어서 뒤돌지 않으면 창밖을 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글로르핀델이 아예 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양피지 위에 글씨를 쓰던 왕은 그 바람에 다시 새로운 양피지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위로 쭉 검은 선이 그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거의 다 써가고 있었는데, 글로르핀델 덕분에 다시 새로 써야했다. 왕의 다른 형제들이었다면, 아마도 그와 당장 말싸움을 했을 것이다.

 

 

"계속 방 안에 있으려면 가만히 있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투르카노도 얼른 소원 비세요. 별똥별이 맨날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투르곤은 약간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관대한 왕이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왕의 말에도 글로르핀델은 꿋꿋했다. 투르곤이 창을 한 번 돌아보기 전에는 성가시게 구는 것을 멈추지 않을 듯 했다. 별똥별이 매일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수도 없이 별똥별이 하늘을 가르는 것을 보았는데 뭐가 그리 특별하다는지 호들갑을 떠는 글로르핀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소원 같은 거 빌지 않아도 전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있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누이와 아내를 빼어닮은 딸과 충성스러운 영주들에 그를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까지. 아버지나 형과는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었지만, 왕은 정말로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더한 것을 바라고 싶지는 않았다.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손 안에 있는 것만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진심이십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글로르핀델은 대체 무슨 소원을 빌었길래 이렇게 유별나게 구시는 겁니까."

"당연히 비밀이죠."

 

왕의 말에 글로르핀델은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자신이 왕을 방해하고 있다는 인식이라고는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태연했다. 참다 못한 왕이 글로르핀델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이 일어섰음에도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으며 집게 손가락을 흔들 뿐이었다. 흥분해 봤자 자신만 바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든 투르곤이 창문에 달린 커튼을 내려버렸다. 밖이 보이지 않으면, 더는 저렇게 시끄럽게 구지는 못할 것 같았다. 왕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쳐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정도였다.

 

"자, 그럼 소원도 다 비셨으니까 얌전히 앉아 계시죠."

"커튼을 치면 창 밖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붉은색 벨벳으로 된 두꺼운 커튼을 치고 틈새마저 리본으로 단단히 매듭을 지은 투르곤이 흡족한 표정으로 글로르핀델을 돌아보았다. 이러면 더는 밖을 보라는 소리는 못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에 글로르핀델이 책상을 탕 쳤다.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이 흔들려서 아예 엎어져 버렸다. 당연스럽게도 왕이 방에 들어와서부터 계속 하고 있던 일이 물거품이 되었다. 검은색 잉크가 양피지 위를 시커멓게 물들여 버렸다. 글로르핀델의 시선은 왕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왕은 책상 위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잠자리에까지 일을 가져왔는지 탄식이 나올 지경이었다.

 

"더 보시고 싶으시면 나가시면 됩니다. 방 안이 조용해질테니 저야 그 편이 좋습니다."

 

애써 미소를 지은 왕이 글로르핀델의 어깨를 밀었지만, 그는 도리어 왕의 어깨를 잡아 끌어서 침대로 데려갔다. 이대로 두면 밤을 새울 게 뻔했다. 밤샘을 한다고 피곤함을 드러낼 왕도 아니었지만, 그로써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재촉하는 이도 없는데 왜 이리 열성인지 글로르핀델이 염려를 할 정도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잉크를 엎은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 주무세요. 어차피 가져오신 일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할테니까 마저 할 생각은 포기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자도 몇 시간 뒤면 일어나야 될텐데 피곤할 겁니다."

 

그의 손길을 물리치려는 왕을 침대 속으로 밀어 넣은 글로르핀델은 목까지 이불로 덮어버렸다. 꼼짝없이 침대 속에 갇힌 꼴이 된 투르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잘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서서히 잠이 몰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글로르핀델은 침대 옆에 앉아서 왕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촘촘했다. 막 잠이 들려는데 깨우면 안 될 것 같아 그는 왕의 뺨에만 살짝 입술을 스쳤다. 이대로 바로 나가버리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버릴테니 잠드는 모습을 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주무세요? 투르카노?"

 

작게 이름을 불렀지만, 투르곤은 대답이 없었다.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을 때는 일을 다 끝내기 전에는 자지 않을 것 같더니 피곤했는지 생각보다 금방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그는 창가로 가서 커튼의 매듭을 풀었다. 그래도 왕은 깨어나지 않았다. 창 밖에서는 아직도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점점 간격이 뜸해지더니 굉장히 밝은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다. 글로르핀델은 그 순간 소원을 빌었다. 엘베레스 길소니엘, 곧 별들의 여왕인 바르다를 찬양하며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기원했다. 다시 커튼을 닫은 그가 잠들어 있는 투르곤게 천천히 다가갔다. 지극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글로르핀델의 손이 잠시 잠든 이의 이마에 얹혔다. 그는 하나뿐인 주군이 이 밤 내내 평안하길 바라고 있었다.

 

 

진단메이커에서 본 별똥별이라는 소재가 인상 깊어서 짧게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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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쿠알론데 관련 동인 설정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알쿠알론데 01 (수정 中)

 

 

짐을 푼 글로르핀델과 투르곤은 저택의 접견실로 향했다. 1층의 오른쪽에 위치한 접견실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그들이 들어가자 올웨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린 치렁치렁한 은발이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의 빛깔을 닮은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있었고, 이마에는 사파이어가 여러 개 박힌 은색의 서클렛을 쓰고 있었으며, 팔에는 파란실로 소라고둥 무늬가 수놓아진 흰색의 기다란 숄을 걸치고 있었다. 실로 바다 요정인 텔레리의 군주다운 눈부시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또 뵙는군요. 놀로핀웨의 아들 투르카노."

 

올웨의 딸인 에아르웬이 투르곤의 숙모였고, 에아르웬의 장남인 핀로드와 친해서 소년도 알쿠알론데에 위치한 올웨의 저택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 글로르핀델과 단 둘이 왔던 적도 있었다. 군주는 친우인 핀웨의 손자 투르곤의 얼굴이 이미 익숙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기도 했고, 알쿠알론데에 찾아오는 놀도르가 드물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같은 요정이기는 했지만 놀도르와 텔레리의 외모는 꽤 달랐기 때문이다.

 

", 당분간 군주님의 저택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투르곤은 올웨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텔레리의 군주가 아니더라도 투르곤에게는 그가 사실상 조부 뻘이었으며, 식객처럼 그의 저택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올웨가 소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검조차 몇 번 잡아보지 않아 소년만큼이나 섬세하고도 매끄러웠다.

 

"어려워말고 편히 지내길. 그대의 조부와는 막역한 사이이니 조부처럼 대해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모쪼록 앞으로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잘부탁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투르곤은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놀도르의 왕자 중 한 명인 투르곤은 텔레리 군주인 올웨의 저택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핀웨는 자손들이 바냐르나 텔레리와도 잘 지내길 바랐고, 막내인 피나르핀은 아내인 에아르웬이 올웨의 딸이었으니 그의 자식들은 조부의 저택을 자주 방문했지만, 장남인 페아노르는 놀도르를 제외하면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편이었다.

 

텔레리를 싫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텔레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도 않은 핀골핀과 그의 자식들이었다. 마침 핀골핀의 차남인 투르곤은 이런 저런 공부를 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기 때문에 유학을 겸해서 알쿠알론데에 있는 올웨의 저택으로 오게 되었다. 올웨의 자식들은 모두 장성하여 출가를 했고, 아내는 장남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올웨는 저택에 혼자 살고 있었었는데, 종종 가족들이 저택에 들르기 때문에 외롭지는 않았지만, 친한 친구인 핀웨의 손자 한 명 정도를 자신의 저택에 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매번 올 때마다 느꼈지만, 티리온과는 정말 달라서 신기합니다."

"그렇지요. 이 곳은 항구 도시니까 티리온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올웨는 투르곤을 볼 때면, 가운데 땅에서 지내던 시절의 핀웨를 떠올렸다. 소년은 요정 치고는 특이하게도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핀웨도 소년 시절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녔던 것이다. 그는 소년보다도 더 짧게 목덜미가 다 드러날 정도로 짧은 머리였는데, 활동하기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어깨 위에서 살랑거리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보면, 언뜻 친우의 그림자가 소년의 위로 스쳐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의 아버지인 핀골핀은 핀웨를 가장 닮은 자식이었으며, 소년은 그의 아버지를 많이 닮았으니 올웨가 그렇게 느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글로르핀델 여기 있는 것들과 저기 있는 것들을 가져가면 돼. , 그리고 그것도 들어 줘."

"투르카노, 조금씩 가져가서 보면 안 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많은데."

"안 돼. 같이 보는 게 더 낫단 말야.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귀찮을 것 같은데."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왕자를 홀로 먼 곳에 보낼 수는 없어서 황금꽃 가문 영주의 외동아들인 글로르핀델이 호위를 겸해 보내졌다. 원래라면 성년도 아닌 투르곤을 다른 군주에게 보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겠지만, 소년은 나이에 비해 상당히 어른스러운 편이었고, 올웨가 핀웨와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글로르핀델은 투르곤을 따라오게 되는 것을 상당히 기뻐했다. 그는 함께 보내지지 않았으면 스스로 따라나서겠다고 했을 정도로 소년을 아꼈다. 핀골핀 가문 아이들의 검술 스승이었지만, 그는 장남인 핀곤이나 장녀인 아레델보다 차남인 투르곤을 더 좋아했다. 고명딸인 아레델은 글로르핀델도 상대하기 힘들 정도로 말괄량이였고, 핀곤은 사촌형인 마에드로스 뒤를 쫓아다니느라 핀골핀 저택에서는 통 얼굴을 보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자연스레 투르곤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유밖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알쿠알론데에는 커다란 장서관이 있었다. 텔레리들이 오랜 세월동안 불러온 자신들의 노래를 아만 땅에 와서 책으로 만들어 냈고, 그것들은 장서관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마이아 옷세와 우이넨이 요정들에게 알려준 노래도 그 중에 있었다. 티리온까지는 전해지지 않은 수많은 전승들이 그곳에 있었다. 탐구욕이 강한 투르곤에게는 하루가 모자랄 정도였다. 덕분에 올웨의 저택까지 무수한 책들을 나르게 되는 것은 글로르핀델의 몫이었다. 투르곤에게 손과 발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또래들보다 키도 작고 힘도 약한 소년은 그날 보려는 책을 다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가끔 글로르핀델은 호위로 와 있는 건지 짐꾼으로 와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래도 앞장서서 가던 소년이 미안한지 가끔씩 뒤돌아보며 미소를 지을 때면, 들고 있는 책들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마워, 글로르핀델."

"고마우면 다음에는 얇은 책들만 골라주세요."

 

간신히 저택의 방에 도착해서 글로르핀델이 책상 위에 책을 올려다 주자 발돋움을 한 투르곤이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소년이 다시 땅에 내려섰지만, 그가 소년을 꼭 껴안았다. 바닷바람이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글로르핀델은 청명하면서도 맑은 푸른 빛깔인 소년의 눈을 바라보더니 그도 소년의 이마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에게는 소년이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고, 곁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의 품에서 벗어난 소년이 바로 책을 펼쳐 들었다. 글로르핀델은 소년을 남겨두고 방을 나왔다. 투르곤은 이렇게 한 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적어도 저 책들의 반 정도는 읽기 전까지는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으니, 그는 그 때까지 연무장에라도 가 있을 생각이었다. 텔레리들은 무술 연마에 놀도르처럼 공을 들이지는 않았지만, 알쿠알론데의 한 구석에도 자그마한 연무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텔레리는 검보다는 활을 즐겨 사용하는지라 연무장에는 과녁들이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글로르핀델은 이미 올웨에게 연무장을 출입할 수 있게 허가를 받은 뒤였다. 원래라면 놀도르인 그가 텔레리들의 연무장에 출입해서는 안 되었겠지만,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드나들게 된 것이었다. 올웨는 무예를 단련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청은 흔쾌히 들어주었다. 투르곤이야 텔레리의 문화를 배우러 왔다지만, 글로르핀델은 그런 데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고, 특별하게 할 만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화살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들이 요란했다. 글로르핀델은 활보다는 검을 쓰는 것에 익숙했지만, 그렇다고 활솜씨가 좋지 않은 건 아니었다. 거의 백발백중에 가까운 솜씨였다. 티리온에 있는 친우인 에갈모스와 두일린이 훌륭한 궁사인지라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글로르핀델도 자연스레 활솜씨를 연마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시콜콜한 내기를 하는데 거듭해서 지나보니 자존심이 상한 그가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고, 최근에는 두 친구와 엇비슷할 정도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두일린과 에갈모스에는 아직 못 미쳤지만, 그래도 이제는 매번 지지는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활을 반납하고 연무장에서 나오면서 투르곤도 데려와야 겠다는 생각했다. 검술이야 늘 가르쳐 주고 있었지만, 그가 활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아직 소년에게 가르쳐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른 지식들은 빠르게 습득하는 편이었지만, 몸으로 하는 것은 서툰 투르곤이라 쩔쩔 맬 것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그런 모습들이 더욱 귀여울 것이다. 글로르핀델은 당장이라도 소년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소년은 보나마나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일 것 같았다. 소년을 잘 구슬러서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새하얀 항구 도시의 거리를 걸었다. 거리를 걷는 요정들의 복장은 놀도르보다 다소 가벼웠다. 선원들도 막 배에서 내려서 거리에 보였는데, 그들은 바닥까지 끌릴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놀도르의 전통 예복들과는 거리가 먼 간소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투르카노, 설마 아까 제가 나갔을 때부터 계속 그대로 있었던 겁니까?"

". 신기한 책들이 정말 많은 걸. 그나저나 생각보다 금방 돌아왔네."

 

투르곤은 방에 들어온 글로르핀델에게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책만 읽었다. 이대로는 손에 들린 책을 다 읽고도 옆에 놓인 책을 또 집어들 것 같았다. 그는 의자에 있는 소년을 안아들었다. 손에 들려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져서 책장들이 팔랑거리며 넘어갔다. 글로르핀델은 소년을 침대 위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도 침대 위로 올라갔다. 두 명의 무게가 실린 침대가 푹 내려앉았다. 방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었지만, 매일 팔베개를 하고 소년을 재워 준다는 게 그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릴 때가 많았고, 사실상 사용하는 것은 한 쪽 침대 밖에 없었다. 이번에 글로르핀델이 소년을 내려둔 쪽은 잘 사용하지 않는 침대 쪽이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침대와는 다르게 책상과는 가까워서 멀리 가지 않고 그 위에 소년을 내려놓은 것이었다.

 

"글로르핀델, 뭐 하는 거야. 책도 덜 읽었는데."

"제가 오늘도 이럴 줄 알았습니다. 책만 읽으러 여기 오신 겁니까?"

 

갑자기 침대 위에 눕혀진 소년이 그에게 불만스러운 시선을 향했다. 막 재미있어 지던 부분이었는데 글로르핀델 때문에 책을 마저 읽지 못하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글로르핀델은 소년이 이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소년의 행동이 야속하기만 했다. 곧 이어 싱긋 웃은 그가 소년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갑자기 뜨거운 바람이 귀에 스쳐서 소년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글로르핀델이 투르곤의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이마에, 눈두덩이에, 눈가에, 콧날에, 뺨에, 턱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까지.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그의 입맞춤을 받던 소년은 아쉬운 듯 한참이나 소년의 입술을 물고 있던 글로르핀델이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 제 안의 알쿠알론데는 이런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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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린 영주 관련 동인 설정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shall we dance?

 

 

네브라스트의 비냐마르 왕궁에서는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왕인 투르곤에게 무도회 같은 걸 여는 취미는 없었지만, 영주인 두일린과 로그가 왕을 부추긴 탓이었다. 씩씩한 놀도르 여성들만 보다가 가녀린 신다르 여성들을 보니 마음이 뛰었다나 뭐라나. 무도회가 열리게 되면 춤이라도 추면서 말을 붙여 보겠다는 미혼인 영주들의 해맑은 부탁에 마음 약한 왕은 그러마 하고 대답을 했다.

 

펜로드가 국고를 그렇게 허투루 낭비할 셈이냐고 나무랐지만, 갈도르가 가끔은 무도회 같은 것도 좋지 않냐며 그가 화를 내려는 것을 말렸다. 결국 영주들은 에갈모스의 사재에서 식대를 충당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아치 가문의 영주인 에갈모스는 왕 다음가는 부자로 놀도르와 신다르, 팔라스림 사이의 무역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 에갈모스에게 불똥이 튄 것은 펜로드의 말에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뭐가 무리가 되냐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에갈모스 공께서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싱긋 웃는 펜로드에게 엉겁결에 대답을 한 에갈모스는 예산을 잡고 보니 상상보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것에 놀랐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부유한데다가 너그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에 관련된 일에는 빠삭한 편이라 할 수 있었지만, 뭐든 금세 잊어버리는 통에 주변인들은 그를 상당히 편하게 대했다.

 

아무튼 투르곤이 네브라스트에 정착한 이후로 처음으로 비냐마르 궁정에 활기가 넘쳤다. 시끄러운 일을 좋아하지 않는 왕 때문에 간간히 들려오는 분수 가문의 피리 소리를 제외하면, 보통 궁 안이 시끌벅적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껏 차려입은 영주들이 차례로 무도회장으로 들어올 때마다 다른 요정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만에서부터 핀골핀 가문을 따라 망명길에 오른 여덟 명의 영주는 투르곤이 네브라스트로 올 때 왕을 따라 자신의 가문을 이끌고 왔다. 그들은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갈도르, 에갈모스, 글로르핀델, 펜로드, 엑셀리온, 로그, 두일린의 순이었다. 무역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에갈모스와 왕 대신 업무를 보고 있는 갈도르를 제외하고 여섯 명의 영주들이 무도회에 참여했다.

 

무도회의 시작은 왕과 왕의 외동딸인 이드릴 공주의 춤으로 시작되었다. 금발의 이드릴은 왕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딸이었다. 어깨에 팔랑거리는 소매가 있는 분홍색의 드레스는 허리에서부터 흰색 프릴이 층층이 달려 있었다. 진한 분홍빛이 공주의 화려한 금발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평소에는 맨발로 다녀 은빛발이라는 뜻의 켈레브린달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오늘은 큼직한 리본이 달린 흰색 공단 구두를 신고 있었다. 길게 내려오는 드레스 덕분에 구두 끝에 달린 리본만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 저랑 한 곡 더 추시겠어요?"

 

아버지인 투르곤이 한 편에 놓여있는 의자에만 앉아있자, 보다 못한 이드릴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왕이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왕국 제일의 장신이었기 때문에 선뜻 춤을 추자고 나서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공주의 금발은 무척이나 탐스럽고 우아하게 보였다. 잠시 딸의 얼굴을 바라본 투르곤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우리 이타릴데와 춤추고 싶어 하는 요정들이 많을 텐데 내가 방해할 수는 없지."

 

그는 딸을 소중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품 안에서 키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의 부모가 자식들을 자유롭게 키웠기 때문이었다. 방임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 주었다. 백부인 페아노르가 자식들을 다소 억압적으로 키우는 것과 달리 핀골핀은 잘못된 일에는 확실하게 야단을 치지만, 그 외에는 크게 간섭을 하지 않았고, 투르곤도 그의 하나뿐인 딸이 원하는 대로 살게 하고 싶었다.

 

왕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같이 춤을 추자고 하는 딸이 고마웠지만, 이드릴과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젊은 남자 요정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바냐르인 어머니 엘렌웨를 닮아 놀도르에게서는 보기 드문 빛깔의 금발을 가진 그녀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화사해 질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물론,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냥한 성격과 다른 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지혜롭기까지 해서 마음속으로 그녀를 흠모하는 이들이 많았다. 투르곤의 말에 이드릴은 드레스를 양 손으로 살짝 들어 올려 인사를 하고는 총총걸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릿세, 나랑도 한 곡 추면 안 되겠니?"

 

대신에 투르곤은 그의 곁을 지나가던 누이를 붙잡았다. 그녀는 영주들과는 한 번씩 춤을 추었지만, 아직 그와는 한 곡도 추지 않았다. 아레델은 하나밖에 없는 왕의 누이였고, 아버지가 있는 히슬룸이 아니라 왕을 따라 네브라스트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불행한 일 때문에 안주인이 없는 왕궁에서 그녀는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그런 자각은 거의 없었다. 투르곤의 부탁에도 그녀는 새침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싫어. 오빠는 키가 커서 고개 아프단 말이야."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옷이 너무 파인 것 같은데."

 

아레델은 은색의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체 부분은 작은 다이아몬드들을 촘촘하게 박아 넣어 굉장히 눈이 부실 정도였다. 드레스는 등이 전부 드러난 것도 모자라 옆트임이 허벅지 위쪽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녀를 보자 투르곤은 혹시라도 흑심을 품는 자들이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감히 왕의 누이를 건드릴 이는 없었겠지만, 그는 정말로 아레델을 아끼기 때문에 염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빠가 내 아버지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이게 더 편하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오라버니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레델은 춤을 추는 것보다는 사냥을 나가는 게 좋았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는 왕의 간곡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무도회장에 있는 것이었다.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휙 돌아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레델은 아래로 늘어뜨리던 검은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땋아서 동그랗게 말아 올렸고, 머리에는 큼지막한 백합꽃 모양의 머리핀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로그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누이가 가버리자 왕은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폐하, 이릿세님께 버림받으신 겁니까."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의자에 앉아서 제각기 춤을 추는 백성들을 바라보던 왕에게 금발의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여덟 영주 중 한명인 글로르핀델이었다. 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무장에서 그가 무술 솜씨를 뽐낼 때면, 몰래 들어오려고 하는 소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혼자서 돌아다니는 게 이상했다.

 

"그대야말로 왜 여기 있습니까? 아마 황금꽃 가문의 영주와 춤을 추려는 여성들이 줄을 서 있을 텐데."

"엑셀리온에게 맡겨두고 왔지요. 그 친구도 제법 인기가 좋으니까요."

 

그는 분수 가문의 영주인 엑셀리온과 가장 친했다. 단정한 외모에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엑셀리온의 주위에는 항상 따르는 여성들이 많았다. 영주의 말에 투르곤은 쿡 웃음을 터트렸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무도회가 시작되자마자 엑셀리온과 글로르핀델의 주변을 빙 둘러싸고 여자 요정들이 모여들었지만, 글로르핀델은 능청스레 웃으며 빠져나왔을 것이다. 엑셀리온도 이런 자리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눈앞에서 남들에게 모진 소리를 하지는 못하는 성격이라서 지금까지 글로르핀델을 대신해 붙들려 있을 게 뻔했다.

 

"상대도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럼 저랑 한 곡 추시겠습니까?"

 

글로르핀델이 갑자기 왕의 손을 잡더니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왕을 향해 반짝거리는 푸른 눈이 마치 소년과도 같았다. 하지만 투르곤은 손을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습니다. 장난을 치려는 생각이면 그만 두세요."

 

계속 그의 곁에 있다가는 분명 그에게 휘말리게 될 게 뻔했다. 왕은 그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도 그와 함께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백성들이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남들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갈까요?

 

글로르핀델은 왕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은 것처럼 왕의 팔을 잡아서 데리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왕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런 식으로 또 끌려 나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다른 이들에게 향하려던 투르곤을 글로르핀델이 잡아끌었다.

 

"아직 무도회가 끝나려면 한참입니다. 폐하께서도 조금은 즐거우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걷는 방향으로 보아 글로르핀델은 정원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홀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흰색의 자두꽃 붉은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정자가 있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팔을 붙잡은 손의 힘이 점점 세어져서 마침내 왕의 입에서 작게 비명이 나왔다.

 

"아, 아파. 글로르핀델."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시네요."

 

투르곤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사내가 기둥 쪽으로 왕을 몰아세웠다. 등이 딱딱한 기둥에 닿자 왕이 살짝 움찔했다. 글로르핀델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고, 오히려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망설이던 왕이 입을 열었다.

 

"글로...읍..."

 

하지만 하려던 말은 갑자기 다가온 사내의 입술에 의해 막혀버렸다. 글로르핀델은 왕이 말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입술이 떨어질 만하면, 다시 방향을 바꾸며 입맞춤을 계속했다. 농밀한 입맞춤이 계속되다가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뭐, 뭐하자는 겁니까!"

 

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도 말까지 더듬거리는 투르곤의 얼굴을 빤히 보던 글로르핀델이 그제야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를 띠웠다. 그가 손으로 흐트러진 왕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고스란히 입술을 빼앗기고 나서야 소리를 지르는 상대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남들 앞에서도."

 

투르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그가 다시 왕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데었다 떼었다. 주위에 다른 이가 없을 때는 이리 귀여운데 남들 앞에만 서면 왕으로 돌아가 버리는 투르곤이 때로는 조금 원망스러웠다.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건 알고 있는데, 자꾸 이런 식이면 저도 기분이 상합니다. 춤 한 번 추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전 춤에는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 잘 추지도 못할 뿐더러 그대의 발을 밟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이릿세 공주님께는 왜 추자고 하셨습니까?"

 

되도 않을 변명을 하는 투르곤에게 글로르핀델이 왕의 누이를 들먹였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왕은 다소 억울한 듯 했다. 사내 둘이서 남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함께 춤을 추자고 권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동생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대와 춤을 추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리 이상하겠습니까. 폐하도 제법 고우신 걸요. 공주님들께 뒤지지 않을 정도로."

"허튼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하물며 저는 여자들처럼 춤추는 법도 모릅니다."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닌데요? 그리고 춤이라면 제가 친절하게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여긴 것인지 왕이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글로르핀델은 왕의 뺨을 쓸어내리더니 다시 손을 붙잡았다. 여인들의 손을 잡고 춤을 춘 적은 손꼽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이제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었다.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제 왕과 춤 한 번 추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얌전하게 저를 따르지 않으시면, 침대 위에서 춤을 추게 해 드리는 수가 있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만 놀리시죠. 남이 들을까 겁납니다."

 

글로르핀델이 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왕의 키가 조금 더 큰 편이었지만, 그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어서 함께 춤을 추는 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깨에 얹지 않은 다른 손으로 왕과 깍지를 낀 채, 한참을 빙글거리며 후원을 맴돌다가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투르카노, 저랑 매일 연습 좀 해야겠습니다. 공주님과 출 때는 제법 추시더니, 공주님이 잘 추셨던 거군요."

"제가 못 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만 하시죠. 벌써 한참 추지 않았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오늘처럼 입어요, 잘 어울리니까."

 

왕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좋아하지 않아 대개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왕의 의복이 수수해봤자 얼마나 수수하겠냐마는 무도회에서 입고 있는 예복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흰 옷에 금박 장식이 되어 있는 옷은 소매가 길게 늘어지지만, 몸통부분은 몸에 꼭 맞았다. 예복은 투르곤의 늘씬한 육체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글로르핀델의 칭찬에 왕이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가 투르곤의 손을 잡고 등을 돌렸지만, 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들어가실 겁니까? 밖에 더 있을까요?"

마지못한 글로르핀델이 왕을 돌아보자 뺨에 부드러운 것이 스쳤다.

 

"일부러 상대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얼마나 작았던지 바로 앞에 있는 글로르핀델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고 있는 것도 크게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있으려니 조금은 답답했다. 그래도 왕이 직접 무도회를 개최한 이상 도중에 자리를 비우기는 곤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방으로 가서 책이라도 읽고 있었을 게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르핀델은 자신의 뺨에 입술을 맞춰 온 왕이 귀여워서 견디지 못하겠다 듯 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저 자신의 왕이 사랑스러워서 품에서 떼어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긴 왕도 얌전히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흔한 설정이지만 제가 보고 싶으니 썼습니다.

Posted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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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돌린 및 인물 설정 날조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櫻色舞うころ : 연분홍빛 춤출무렵

 

 

"폐하, 벌써 벚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네. 봄이니까 그렇지요. 왕궁 근처에도 벚나무가 많으니 오시는 길에 보셨나 봅니다."

 

글로르핀델은 오늘도 곤돌린의 왕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투르곤은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능숙하게 서류들을 읽어 내렸다. 왜 그리 할 일이 많은지 하루도 게을리 한 적은 없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책상 위, 책상 옆에까지 서류들이 쌓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왕은 상당히 성실했고, 일처리 하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하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벚꽃 아래를 함께 걷고 싶었지만, 왕은 전혀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죠? 그럼 잠시만 나갔다 오시죠."

"글로르핀델이나 나가시면 되겠네요."

 

왕은 손을 잡아끄는 글로르핀델의 행동에도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어코 뒤로 돌아온 글로르핀델이 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잉크와 종이의 향이 났다. 그가 그리 좋아하는 향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희미하게 섞인 입욕제의 향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소리를 내어 왕의 뒷목을 핥기 시작했다. 혀가 닿을 때마다 간질거려 투르곤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하세요...읏..."

투르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글로르핀델이 그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그만하시라고 했죠."

옆에 있던 책을 든 투르곤이 글로르핀델의 머리 위를 툭툭 쳤다.

 

"책으로 때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집무실에서 이러는 건 괜찮습니까."

그는 글로르핀델이 떨어지자 손을 들어 목 뒤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피부는 살짝 부풀어있었다. 그나마 머리가 길어 가려지는 게 다행이었다. 왕에게도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신하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본인도 지은 죄가 있어 고개를 다시 서류 쪽으로 돌렸다.

 

"이러기만 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글로르핀델이 왕의 옷깃에 손을 데려고 하자, 투르곤이 그 손을 쳐냈다.

 

"어젯밤에 상대해 드렸잖습니까."

"전 부족한데요."

그의 말에 왕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얼굴, 귀여운데요? 투르카노."

싱글벙글한 얼굴이 된 글로르핀델의 투르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당분간은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제가 가만히 놔두지 못할 텐데."

 

그는 간밤의 왕을 떠올렸다. 잠에서 덜 깨어서 눈가를 문지르는 것도 허공에 흐느적대던 팔도 모두 귀여웠다. 어찌나 귀여웠는지 씻어주겠다며 욕실로 끌고 들어가서는 거기에서도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꽃과 말린 과일 향의 입욕제 향이 아직도 그와 왕의 머리에서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글로르핀델의 입술이 이마에서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왕이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 손에는 급하게 처리해야 될 서류들을 든 채였다.

 

"따라오지 마시죠."

 

글로르핀델이 말리기도 전에 왕은 집무실을 나가버렸고, 혼자 방 안에 남겨진 글로르핀델은 왕의 의자에 앉았다. 이미 왕의 손을 거친 서류들은 모서리까지 딱딱 맞춰서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깃펜으로 적어내린 글씨체는 활자로 찍어낸 것처럼 정갈했다. 단정하면서도 왕을 닮아 길쭉한 글씨들은 상당히 유려한 것이었다. 그는 왕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쫓아가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겨주다가 집무실에서 뛰쳐나갔을 정도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할 일을 끝내면 궁으로 다시 들어올 테니 몇 시간 뒤에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공공 도서관도 따로 있었지만, 궁 안에는 왕의 장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개 글로르핀델이 거기까지 왕을 쫒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나마 왕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집무실에서 장서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다보니 확실히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아침부터 침실에서 일어나 바로 집무실로 들어가 버려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며칠 사이에 모두 꽃망울을 터트린 모양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한잎 두잎 흩날리는 분홍색과 흰색의 꽃잎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방해꾼도 없겠다 급할 것은 없었으니 천천히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걸어 장서관으로 향했다.

 

따로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두지는 않았지만, 3층으로 된 장서관의 가장 꼭대기의 구석진 곳이 왕이 주로 있는 곳이었다. 3층의 구석진 자리는 퀘냐로 된 자료들만 있어 학자들이 아니면 잘 올라오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언어학에 관련된 딱딱한 책들만 있었으니, 가끔씩 오는 학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오는 이가 드물었고, 왕에게는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예상대로 책장 사이의 의자도 탁자도 모두 비어 있었다. 엉겁결에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글로르핀델이 서류를 흐트러트리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나름대로 그도 영주인지라 중요한 서류들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복수삼아 기껏 정리해 둔 것 서류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고는 했던 것이다. 왕은 그가 제발 순순히 방을 나갔기를 바라며 의자 위에 앉았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장서관의 서편이었다. 동편에는 창들이 무수히 많았고, 거기에서 들어오는 빛이 눈이 부셔 무언가를 보기에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동쪽에는 책을 읽다 지친 이들이 잠시 쉴 수 있게 기다란 의자들이 커다란 창들 아래에 잔뜩 놓여있었다. 한참을 서류들과 씨름하다보니 그럭저럭 급히 처리해야할 일들은 끝낼 수 있었다. 왕의 인장이야 챙겨 나오지 못했지만, 다시 들어가서 찍으면 되었다. 혼자 있으면 그나마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일들도 글로르핀델이 있을 때면, 두 배나 세배 정도 처리 속도가 느려졌다. 일부러 신경을 꺼 보려고 해도 툭툭 한 마디씩 던지고, 근처에 다가오는 통에 일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서류를 챙겨든 왕은 집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집무실은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의자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가기 전과 바뀐 게 없었다. 글로르핀델이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책상 위는 예상보다는 멀쩡했다. 서류를 몇 개 들추어본 것을 제외하면, 사라지거나 순서가 바뀐 것도 없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순순히 나갔나 싶었다. 반대로 돌아간 의자를 돌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미리 표시해둔 인장을 찍어야 할 곳에 인장까지 다 찍었으니 오늘 안에 해야 할 일들은 그럭저럭 끝난 셈이었다. 그 사이 창 밖에는 석양이 내리 깔리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간밤에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인지 작게 하품이 나왔다. 식사를 하고 다시 봐야할 것 들이 있었다. 왕은 잠을 깨려면, 잠시 정원이라도 산책을 해야겠다 싶었다. 다소 불편한 정복을 갈아입고 좀 더 편한 복장이 된 왕이 정원으로 가려고 앞뜰을 나선 순간 손목을 낚아채는 자가 있었다. 누구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곤돌린 왕의 손목을 잡아챌 만한 것은 누이인 아레델이나 그의 황금빛 영주가 아니면 없었다.

 

"아직도 안에 계실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세요?"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손목을 잡은 단단한 손을 떼어낸 투르곤이 살며시 미소를 띄웠다. 낮에는 어떻게든 일을 방해하려 드는 신하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가 정말로 글로르핀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먼 땅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와 준 충직한 자였으며, 아마도 곤돌린 안에서도 누구보다 왕을 아끼고 있을 존재였다. 행동 방식을 꿰고 있어서 지금쯤이면 왕이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투르카노니까. 폐하의 얼굴만 보아도 지루할리가 없지요."

 

이렇게 말한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 빛이 하도 화사해서 피곤함마저 달아나 버릴 정도였다. 정원까지 걸어가려 했지만, 궁전의 뒤뜰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있었고, 뒤뜰을 걷다보면 졸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둘은 벚꽃이 흩날리는 뒤뜰을 천천히 거닐었다. 머리카락 위에 미풍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연신 떨어졌다.

 

"꽃들도 폐하를 알아보나보네요."

 

키가 큰 투르곤의 머리카락에는 유독 많은 꽃잎들이 얹혀 있었다. 가지 끄트머리가 왕의 머리에 스쳐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왕이 머리를 흔들자 사방으로 꽃잎들이 흩어졌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날리는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고왔다. 잠시 공중에 떠 있는 꽃잎들이 그림속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바쁜 일은 이제 없으시죠?"

"그렇다고 식사 후에 또 찾아오지는 마세요. 요즘 한가하신가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제게 찾아오시다니."

 

조용히 걷기만 하려고 했지만, 글로르핀델은 쉬지도 않고 왕에게 말을 붙였다.

 

"폐하께서 날이 갈수록 귀여워지시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제게 귀엽다고 하는 건 글로르핀델밖에 없습니다. 뭐가 그리 귀여우십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게 귀엽다는 거지요."

 

서쪽 땅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그에게 귀엽다는 말을 하는 건 글로르핀델 정도 밖에 없었다. 엄연히 곤돌린의 군주였음에도 왕의 어린 모습을 보았던 글로르핀델에게는 여전히 어린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게 귀여워하시는 소원이나 들어주시렵니까."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 투르곤이 먼저 말을 돌렸다.

 

"무슨 소원이신데요? 먼저 듣고 나서 결정하겠습니다."

왕의 말임에도 스스럼없이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호기로운 대답이었다. 그만큼 왕을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투르곤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좀처럼 부탁을 하는 일이 없는 자신의 말에 설레는 얼굴이 된 글로르핀델이 신기한 탓도 있었다.

 

"누이의 반려나 어서 찾아주세요."

그에게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누이 아레델이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을 가진 고운 누이였지만, 만만치 않은 성격 탓에 쉽게 접근하는 사내들이 없었다.

 

"그건 저도 무리입니다. 공주님께 청혼했다가 퇴짜 맞은 영주들이 몇 명인지 알면서 그러십니까."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곤돌린 각 가문의 영주들 중에 상당수가 아레델에게 청혼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하기만 했다. 남자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그녀였지만, 결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제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누이인데."

"폐하께서 얼마나 이릿세 공주님을 사랑하시는지야 제가 잘 알지요. 이드릴 공주님이 섭섭해 하시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딸아이와는 다르지요. 하나밖에 없는 누이인걸. 딸아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끼고 있는걸요."

왕은 어머니도 없이 홀로 자신의 곁을 지키는 그의 딸을 무척이나 아꼈다. 핏줄에게라면 유독 약한 요정들이었고,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형이 아닌 가족은 누이와 딸 밖에 없었기에, 왕은 그 둘에게는 무엇이든 해 주려고 할 정도였다.

 

"신기하십니다. 제게는 형제자매가 없으니 폐하가 이렇게 가족들에게 끔찍한 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글로르핀델도 자신의 가족을 가지면 알게 될 겁니다.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입니다."

투르곤의 말에 왕의 곁에서 걷던 글로르핀델이 우뚝 멈추어 섰다.

 

"제가 가정을 가지시면 좋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보통 결혼을 하실 나이가 한참 지나기는 했지만, 평화로운 왕국 안이니 가정을 가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요."

태연스러운 왕의 얼굴에 글로르핀델은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속도 좋으십니다. 제가 결혼을 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충직한 영주의 결혼인데 마땅히 축복해 드릴 일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밤마다 제게 찾아오실 일도 없으실 겁니다."

이번에는 보통 때와는 달리 그가 왕에게 놀림을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글로르핀델은 목이 쉴 때까지 자신의 이름만 부르게 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하며, 투르곤의 뺨에 손을 올렸다.

 

"투르카노."

잔잔한 목소리였다. 장난기가 가신 얼굴을 본 투르곤도 그의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제가 당신을 두고 결혼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까지 지키겠지만, 누구와도 결혼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게는 당신밖에 없으니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매끈한 얼굴선을 천천히 쓸던 그의 얼굴이 다시 언제나처럼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이 글로르핀델의 선택이라면, 제가 참견할 바는 아니겠지요."

왕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눈에 익은 아치가 나타났다. 그들은 뒤뜰을 한 바퀴 돌아서 처음의 장소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왕은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돌아서서 먼저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더니 글로르핀델의 심정이 딱 그와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왕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휘둘리고 있는 것은 자신 쪽이었다.

 

 

가끔은 관계 전환도 시켜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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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시대 1499년 경 (엘렌웨 사후, 헬카락세)


횡단 과정이 어땠는지는 멋대로 상상했습니다.



[실마릴리온/투르곤] 헬카락세



바깥에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불이 피워져 있는 막사 안에는 온기가 머물고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인 건 아니었다. 투르곤은 며칠 째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의 딸은 이미 오래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모인 이드릴의 막사에 머물고 있었다. 졸지에 어머니를 잃어버렸지만, 생각보다 씩씩하게 이려내려 하고 있었다. 글로르핀델은 그녀를 딱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곁에 있지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금발의 영주는 눈을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인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토록 평정을 잃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이일 때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투르곤은 어른스러운 모습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모두 있었으니 어리광을 부려도 뭐라 할 자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는 왕자의 차가운 뺨을 쓸었다. 처음 막사로 옮겼을 때 보다는 체온이 돌아와 있었다. 오열하며 눈물을 쏟아내던 왕자는 형이 그를 일으켜 세우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쭉 이런 상태였다. 처음에는 워낙 체온이 낮아져 있어 어의도 오늘을 넘길 수 있을 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빙하가 녹아내린 저 찬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셨는데..."


닦달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혹한의 빙하 속에서는 바로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는 다른 부분의 빙하마저 녹아내릴지 몰랐다. 막사를 세우고 나서야 재빠르게 불을 피우고, 막사 안에 왕자를 데려다 놓았다.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간이 침대 밖에 없었다. 두터운 이불을 모아와서 몇 겹이나 덮어주고 온 종일 그가 곁에서 머물렀다. 


투르곤의 아버지인 핀골핀은 정이 없는 자가 아니었지만, 백성들을 돌보는 걸 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이미 사망한 자가 하나 둘인 건 아니었지만, 왕자의 아내가 죽은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백성들 사이에 크게 동요가 일었고,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제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자는 자도 없었지만, 처음의 의욕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글로르핀델은 다시 투르곤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닦아주다 보니 어느새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왕자는 때로 악몽을 꾸는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입 밖에 내였다. 그러나 살작 흔들어보아도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긁힌 상처하나 없었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그가 다시 막사로 돌아왔을 때, 투르곤은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글로르핀델마저 그가 드디어 깨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릴 정도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간이 침대 옆으로 다가가 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투르카노."


답이 없었다.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가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투르곤은 마지 못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마주한 눈에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 어두운 푸른색의 눈동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어떠한 감정도, 심지어 살아 있다는 생기마저도 없었다.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요깃거리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그렇게 말한 글로르핀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머리에 손을 대자마자 투르곤이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이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경악과 공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괜찮습니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건..."


 그는 글로르핀델을 향해 손을 휘저었지만, 그 손은 글로르핀델의 손에 닿지 못했다. 극심한 충격에 스스로 닫아버린 것처럼 투르곤의 눈동자에는 어떤 것도 비치지 않는 듯 했다. 요정들에게 아내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자는 눈 앞에서 아내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글로르핀델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정인조차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더욱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시각이 차단된다는 건 상당히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분명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데도 깜깜한 어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새카만 어둠은 물 속에 잠겨 있었을 때를 생각나게 했다. 글로르핀델은 왕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바로 남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불려온 어의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며, 체온을 유지하게 해 두라는 말만 하고 별다른 처치를 해 주지는 않았다.


다른 자들은 어련히 글로르핀델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각자가 자신을 챙기는 것만도 힘들었던 것이다. 빙하속의 행군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된 것이라 조금을 가고 나면 막사를 세우고 상당한 기간을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무리가 워낙 많은 수나 보니 처음과 끝의 거리가 지나치게 벌어지는 경우가 잦았고, 그래서 일정 거리를 지나면 정주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엘렌웨의 사망으로 갑작스레 멈추어 선 것이기는 했으나 모두가 지쳐있어서 이번에도 오랜 휴식이 될 듯 했다. 투르곤은 깨어난 날 내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법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글로르핀델을 부르지도 않았다. 음식도 먹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먹였지만, 잠시 뒤에 모두 게워내고 말았다. 


이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질 리 없었다. 기운도 없을 뿐더러 일단 눈이 보이지 않으니 투르곤도 밖에 나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탈수라도 올까 싶어 물을 조금 마시게 한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었다. 지루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결국 다음날이 되어서야 핀골핀이 아들을 찾아왔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도 상당히 투르곤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부름에도 흘깃 시선을 주었을 뿐,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던 아버지의 크고 따듯한 손이 아들의 어깨 위에 얹혔다. 


"그래, 힘든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다른 말은 없었고, 망명 놀도르의 대왕은 다시 막사 밖으로 나갔다. 때로는 백마디의 말보다도 기다려 줄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상처를 감내할 수 있을 때 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오빠, 좀 괜찮아?"

"투르카노, 이타릴데가 널 찾고 있어."

"형님,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구경이라도 하러오듯 왕자의 형과 누이와 아우가 차례로 찾아왔지만, 그의 상태를 보고 곧 발길을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은 글로르핀델이 다시 식사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 휑한 느낌이 드는게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급히 돌아와 보니 얌전히 있어야할 투르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는 흐트러진 이불만이 남아있었다.


막사 안에는 조그맣게 불이 피워져 있었기 때문에 투르곤은 겉옷도 걸치지 않은 한겹의 실내복 차림이었다. 혹한의 바깥에 그 상태로 나가는 건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바깥에는 눈보라까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왕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눈보라가 더 강해지기 전에 막사 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인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눈도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를 간 건지 걱정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던 시각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깜깜함 속에서 작은 빛줄기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살아있었다. 죽지 못했다. 손과 발, 침대. 서서히 막사의 모습들이 또렷해 졌다. 줄곧 곁에 있던 글로르핀델은 자리를 비운 듯 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밖으로 나갔는데,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도 잊은 채였다. 


밭 밑에서 느껴지는 눈의 차가움과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싸늘한 바람에 몸이 꽁꽁 얼어 붙었지만, 이를 까득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가 계속해서 서로 맞부딫쳤다. 놀도르들은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는데, 투르곤은 놀라운 감각을 발휘해서 아내가 사라져 버린 곳으로 향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몸은 착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빙하가 깨진 모습은 그대로였다. 틈은 깊어서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 발자국이면 되었다. 한 걸음, 단 한 걸음이면 충분했다. 다가가기 위한 한 걸음이었다. 놓친 것이 손 하나 차이였다면, 다가갈 수 있는 것도 한 걸음이면 되었다. 그가 막 찬물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을 때, 글로르핀델이 그를 붙잡았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간발의 차이였다. 때마침 글로르핀델이 나타난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앞쪽에 있던 빙하가 떨어져 틈 사이를 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투르곤의 모습은 물 속에 잠겨 버렸을 터였다. 이제 더 이상 겉으로 드러난 틈은 없었다. 


그의 품에 안긴 왕자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가만히 있었다. 몸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급한대로 외투를 벗어 그를 감쌌다. 키는 조금 차이가 났지만, 그리 큰 차이는 아니어서 글로르핀델은 어렵지 않게 투르곤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원래라면 분홍빛에 가까워야 했을 입술은 멍이 든 것처럼 시퍼렇게 변해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한기가 느껴지는지 왕자가 심하게 몸을 떨었다. 


돌아오는 내내 눈보라가 강했다.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지나 그들은 가까스로 막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화로 속에 피워둔 불은 거의 다 꺼져가고 있었다. 그나마 온기가 남아 있는 막사 안은 훈훈했다.


"엘렌웨님을 이제 다시 만나실 수 없습니다."


잔인할 정도로 단호한 말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몰아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원히 모시기로 한 주군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이기적으로 들릴 지 몰라도 곁에 있었으면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곁을 지켜주겠습니까."


약속이었다.


"평생동안 어디든 따를겁니다."


다짐이었다.


영생을 사는 요정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이라도 괜찮았다. 군주인 핀골핀의 차남과 핀골핀 가의 가신으로 만났지만, 망명이 시작되기 전 글로르핀델은 투르곤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어째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그도 의아할 정도였다. 핀골핀은 훌륭한 군주였고, 하물며 투르곤의 형인 핀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선택한 것은 투르곤이었다. 망명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핀골핀과 투르곤 또한 떠나게 되어서 그도 가운데 땅을 향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투르카노, 제 말 잘 들으세요."


투르곤은 버림받은 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한 없이 약하고 부서질 것만 같았고, 글로르핀델은 그런 주군이 애처로웠다. 어떤 말이라도 해서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엘렌웨님께서는 우리의 눈 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언제나 가슴 속에 살아 계실 겁니다."


그가 투르곤의 손을 붙잡아서 가슴으로 가져다 대었다. 맞잡은 손이 함께 닿아 있었다. 조용한 막사 안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머뭇거리던 그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터져나온 말은 절규와도 같았다.


"왜 구하지 못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었다면, 구할 수 있었을 지 몰랐다. 하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아내는 저 밑으로 가라앉아 좁은 틈에 끼었다. 품에는 아이가 있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떨어지는 과정에서 어디를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딸 아이는 의식이 없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없었지만, 아내를 포기하고 물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시죠. 그리고, 저도 당신과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글로르핀델은 가족들을 떠나 그를 따라가 온 것이었다. 투르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얼굴위로 뜨거운 것이 스스로를 위로하듯 흘러내렸다. 글로르핀델은 왕자를 토닥거리며 어깨에 기대게 했다. 아마도 언제까지고 왕자는 이 빙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잊지 못할 터였다.


눈물 때문에 얼굴에는 머리카락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온 글로르핀델이 투르곤을 무릎 위에 눕혔다. 조심스레 한가닥씩 머리카락을 떼어내었다. 도저히 입맛이 없다고 해서 기껏 끓인 수프는 반도 채 먹지 못했다. 글로르핀델은 떠나기 전 나무의 밝은 빛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자장가를 불렀다.  악기 소리 같은 목소리가 잔잔했다.


"두 분 정말 잘어울리시는데요."


글로르핀델이 엘렌웨의 손을 꼭 잡고 산책을 하는 투르곤에게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넷다. 잠에서 깨어나면 둘은 저택의 근처를 그렇게 걸었고, 일찍부터 찾아온 글로르핀델이 눈치도 없이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글로르핀델님."


아담하고 솜처럼 보드라운 표정을 가진 여성이었다. 엘렌웨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의지가 강해서, 일족 중에 아무도 망명에 따라 나서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아이와 남편을 따라 떠나겠다고 했다. 왕자의 어머니마저 아만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는데도 그랬다.


처음 빙하를 보았을 때, 모두 질겁하고 말았다. 배가 없어서 이 빙하를 지나지 않으면 페아노르의 무리를 따라갈 수 없었는데도 엄두가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만에는 겨울도 추위도 눈도 없었다. 축복받은 땅은 늘 온화했다. 모두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었다. 사방이 흰 빛이었다. 나무도 풀도 없었다. 눈이 이상해 졌나 싶을정도로 흰색 뿐이었다. 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혹한이었다. 셀 수 없이 먼 거리를 걸어왔는데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고되고 힘든 나날들이었다. 


"주무세요?"

"아니요."


글로르핀델은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투르곤이 잠이 들 때까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슬슬 목이 아파오려 했지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깨 아래로 길게 금발을 내리고 있었는데, 투르곤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아이가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렇게 반복해서 노내를 부르고 나서, 글로르핀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잠잠해졌다. 


투르곤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막 잠이 든 모양이었다.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조금은 풀려있었다. 움직이면 다시 깰까 싶어 그도 뒤로 등을 기대었다. 의자 위에 앉아있던 게 다행이었다. 그도 투르곤이 깨어나지 않은 며칠동안 푹 자지 못해서 눈을 감기가 무섭게 단잠이 쏟아졌다. 화로에서는 꺼지지 않고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섬세하게 쓰고 싶은 부분이 많았는데 인내심의 한계란 슬픕니다. 헬카락세는 이제 그만 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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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 설정 난무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펜로드] 집무실로부터의 탈출

 

 

"폐하, 잠깐 밖에 안 나가실래요?"

글로르핀델은 오늘도 집무실의 주인이라도 된 양 안락의자에 앉아 투르곤 쪽을 보고 있었다. 막상 방의 주인이자 왕인 투르곤은 몇 번 사용해 본적도 없는 것이었다. 가죽과 원목으로 된 안락의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밖에 나가는 것보다는 의자에 몸을 기대어 낮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왕에게는 처리할 일이 많았다.

 

"됐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잔뜩 기대에 부푼 그의 말에도 왕의 말은 단호하기만 했다. 벌써 몇 시간째 그런 모습이었다. 왕이 서류더미를 하나씩 옆으로 내릴 때마다 반복적으로 글로르핀델이 말을 걸고, 왕이 대답을 하는 식이었다.

 

"오늘 안에 꼭 다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어린아이처럼 실망한 표정이었다. 금발을 의자 뒤로 늘어트리고 있던 그가 드디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와서 책상을 탕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쳤다.

 

"매일 그런 식이지 않습니까. 심심하니 놀자는 거란 걸 압니다."

왕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깃펜을 들어 섬세한 글씨체로 서명을 했다. 글로르핀델은 안중에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매도하지 마십시오. 이래 뵈도 폐하의 충성스러운 영주가 아닙니까."

책상을 돌아 왕의 옆으로 다가온 그가 투르곤의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투르곤은 역시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나하나 대응해 주면 성가신 일만 늘 뿐이었다.

 

"말이라도 못하면, 알겠습니다. 일단, 밖에서 기다리시죠."

 

집무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누누이 일러도 글로르핀델은 어떻게 해서든 들어오려고 했다. 막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이쯤 되면 슬슬 포기할 법도 할 텐데, 그는 도무지 포기란 걸 몰랐다. 왕의 시녀들도 왕을 위해 준비해 온 다과를 글로르핀델이 주섬주섬 먹고 있는 모습이 익숙할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풍경이랄까. 오히려 그가 연무장에 나가 찾아오지 않는 날이면 시녀들이 집무실을 기웃거릴 정도였다. 눈부신 금발의 영주를 사모하는 시녀들이 제법 되는 탓이었다.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시녀들에게도 꽃같은 웃음을 보여주는 잘생긴 영주를 싫어할 시녀들은 거의 없었다.

 

"글로르핀델, 또 여기 있었습니까?"

 

정갈한 발소리와 함께 날카로우면서도 기품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동시에 두 가문의 영주자리를 겸하고 있는 펜로드의 것이었다. 왕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그가 글로르핀델쪽으로 살짝 눈을 흘겼다. 백성들에게는 마냥 온화한 그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면 놀랄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영주들에게는 상당히 엄격하게 대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주로 언성을 높이는 대상들 중 하나는 이곳에는 없지만, 영주들 중에 어린 제비 가문의 영주 두일린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황금꽃 가문의 영주인 글로르핀델이었다. 아마도, 곤돌린에서 그가 소리를 지르고 있다면, 둘 중의 하나가 무슨 사고를 쳤다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영주께서는 왜 또 폐하의 집무실에 계시는 겁니까."

글로르핀델은 훼방꾼이 들어온 게 못마땅한 듯 불만으로 가득 찬 표정을 펜로드를 응시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그의 시선에 펜로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의 말이 왕의 앞에서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인 것 같았던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마치 그대는 용무라도 있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투르카노, 아니다 폐하를 보러 왔습니다만."

 

그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말에 펜로드가 이마를 짚었다. 곤돌린의 왕이 막내 동생이라도 되는 양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가 영주가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왕국 내에서 왕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는 것은 공주인 아레델과 영주들 중에 가장 연장자인 갈도르, 그리고 글로르핀델 정도가 전부였다. 앞의 두 명이 부르는 것 까지 뭐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글로르핀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 또 그런 식으로 폐하의 존함을 마구 입에 올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왜 안 됩니까? 뒤에 폐하라고 붙였는데요."

 

뻔뻔스러운 그의 태도에 펜로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철이 들 줄 모르는 친우를 어찌해야 좋을지. 따지고 보면, 글로르핀델이 펜로드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는 왕의 형인 핀곤보다도 손위였고, 펜로드는 왕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글로르핀델에 비하면 한참 어렸다. 이미 수천 살도 넘은 그들에게 단순한 나이 비교야 별 의미가 없었지만.

 

"폐하, 글로르핀델이 계속 특별한 용건도 없이 드나들게 두실 생각이십니까."

글로르핀델과 더 얘기를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펜로드가 참다못해 투르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왕 역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둘이 있을 때를 제외하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단단히 일렀는데 기어코 이 꼴이 난 것이다. 상대가 그나마 펜로드여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지만, 시녀들 앞이기라도 했다면, 왕의 체면이 땅에 곤두박질 쳤을 뻔 했다.

 

"저도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 도무지 듣질 않는 걸 어쩌겠습니까."

펜로드는 왕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가지고 오면 늘상 볕 좋은 창가에서 놀고 있는 글로르핀델이 눈에 띠어 괜히 한 마디 해 본 것이었다. 제멋대로인 영주에게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은 펜로드보다는 왕 쪽일 것이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제가 데리고 나가도록 하지요. 일단, 이것부터 받아주십시오."

작게 한숨을 쉰 펜로드가 투르곤의 팔에 서류더미를 안겨주었다. 눈의 탑 가문과 기둥 가문의 올해 예산안이라고 했다. 그는 가급적이면 빨리 결재해 달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펜로드가 왕에게 인사를 올리고 뒤돌아서서 글로르핀델의 쪽으로 다가왔다. 붙잡고라도 끌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먼저 펜로드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일부러 이러시는 겁니까? 하필이면 저렇게 서류 더미를 들고 오시는 법이 어디 있나요."

"애도 아니고 왜 이러십니까. 폐하를 방해하는 건 그만두시고, 저와 함께 나가시지요."

그는 글로르핀델의 팔을 잡아끌었다. 물론, 금발의 영주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펜로드도 힘이 약한 편은 아니었지만, 곤돌린에서도 무술이라면 손에 꼽힐 정도인 글로르핀델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왜 이러십니까. 볼일도 없으신 것 같은데."

잠시 동안 실랑이가 벌어지고, 억지로 데려 나가는 걸 포기한 그가 글로르핀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폐하와 저는 혈육 같은 사이인데 이 정도도 안 됩니까."

어깨에 올린 손을 치우는 그의 얼굴에는 의기양양한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백전백승. 직접 세어본 적은 없었지만, 펜로드가 글로르핀델의 뜻을 꺾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말인즉 그의 입만 아픈 잔소리였다는 뜻이었다.

 

"공과 사는 제발 구별하십시오. 글로르핀델. 공과 폐하의 관계를 모르는 영주는 없습니다만, 집무실에까지 들어와서 이러는 건 예의에 어긋납니다."

펜로드는 마지막 말을 마치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어코 글로르핀델이 지지않고 한 마디를 더 했다. 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지만, 이미 뱉어낸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아주 누구랑 똑같으십니다."

그의 말에 투르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는 결코 아니었다.

 

"글로르핀델, 혹시 그건 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생긋 웃는 왕의 얼굴을 본 펜로드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왕은 인자했지만, 그가 저런 식으로 웃을 때는 대개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는 의미였다.

 

"맞습니다만."

그러나 역시 글로르핀델이었다. 가시 돋친 투르곤의 말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싱글거렸다. 둘 사이에 낀 펜로드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다가 황급히 왕의 집무실을 나갔다.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말씀해 보시죠."

"투르카노랑 똑같다고 했지요. 아아, 어릴 때부터 투르카노랑 어울리게 두는 게 아니었어요. 누가 보면 펜로드가 왕의 친형제인줄 알겠습니다."

 

펜로드가 나가자마자 그는 바로 존칭하나 없이 왕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보통이라면 당장이라도 시종들의 팔에 붙들려 끌려 나가야 했겠지만, 그가 왕에게 이렇게 구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왕이 왕위에 오르기 한참 전부터 익숙해진 호칭은 입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왕도 친근하게 자신을 부르는 그가 싫지는 않았다. 아버지 같은 갈도르와 누이를 제외하면, 이정도로 친밀한 관계인 영주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싫으십니까?"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투르곤이 글로르핀델 쪽으로 걸어오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의 이마를 꾹꾹 눌렀다. 왕의 키가 영주보다 한 뼘정도 커서 자연스레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왕의 키가 더 컸어도 글로르핀델은 전혀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요."

능글맞게 웃은 그가 제 이마를 누르는 왕의 손가락을 떼어내더니 그대로 왕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예상치 못한 동작에 중심을 잡지 못한 투르곤이 글로르핀델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러다가 서로의 발이 엉켜서 그대로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밑에 깔린 글로르핀델은 부딪힌 곳이 아프지도 않은 지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왜 이러십니까. 다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했을까 걱정스러운 눈길로 글로르핀델을 바라보던 왕은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그대로 있을 수는 없어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왕을 품 안에 가두고 놓아 주지 않았다.

 

"이런 투르카노라서 아주 귀여운걸요."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말하는 통에 듣는 왕 쪽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방음이 비교적 잘 되는 집무실이었는데도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아주 나쁜 취미를 가지고 있다니까요."

투르곤은 쑥스러워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글로르핀델은 옆으로 돌려진 머리를 붙잡고, 왕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길쭉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는 그곳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왕이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려고 했지만, 목에 닿은 그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펜로드가 가져온 것만 다 하고 나면, 상대해드릴테니 나가있으세요."

손을 들어 글로르핀델의 머리를 밀어낸 투르곤이 글로르핀델의 손에 조금 엉켜버린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물론 금방 끝낼 수 있는 분량은 아니었으니, 사실상 내쫓겠다는 말과 같았다.

 

"폐하, 이렇게 절 내보내고 나면 며칠 동안 안 나오실 생각이신 거 다 압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투르카노에 대한 거라면 뭐든 잘 알고 있어요."

투르곤은 때때로 안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며칠이고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왕의 집무실인지라 간단한 요깃거리나 잠시 눈을 붙일만한 가구들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오래 있지만 않는 거라면 큰 무리가 없었다. 그것은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그가 취하는 방식이었다. 방해꾼은 주로 글로르핀델이었다.

 

"이 손 못 놓습니까."

 

왕은 영주의 손에 붙잡힌 두 손을 빼내려 했지만, 글로르핀델은 왕을 질질 끌고 마침내 바라던 밖으로 나왔다. 서류뭉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왕을 들어 올려 빙빙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몇 대 맞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그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 전날 왕이 세워둔 시간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일은 다반사였다. 꼼꼼한 성격의 왕은 전날 계획했던 일을 모두 마치지 않으면 잠자리에도 들지 않는 성격이었고, 글로르핀델의 손에 이끌려나와 놀다보면, 순식간에 밤이 되어 있었다. 지친 채로 집무실에 돌아오면, 산더미처럼 쌓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틀어박혀서 일처리만 하는 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떨 때는, 밖에 나갔다가도 기어이 다시 따라 들어온 글로르핀델은 간이침대에 누워 먼저 잠이 들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다보면 방해라도 하고 싶어졌지만,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 잠자코 손을 빠르게 움직일 뿐이었다.

 

"폐하 납치 성공! 펜로드 퇴치 성공!"

"누가 듣겠습니다."

신나서 외치는 글로르핀델의 입을 투르곤이 얼른 두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진중한 펜로드와 쾌활한 글로르핀델은 매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 거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애 같은 글로르핀델을 펜로드가 타일러 보려다가 실패하는 쪽이었지만. 정말로 그들이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왕도 그들의 말이 끝날 때 까지 기다리는 편이었다.

 

"농담인데 왜 그러십니까. 아무튼 이왕 나오셨으니까, 이제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어차피 오늘 안에 일들을 다 하기는 틀린 것 같군요. 새벽까지 해야 할 테니까요. 이러다가 제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책임지실 겁니까."

"저는 그 편이 더 좋은데요? 늦게까지 끌고 다녀야겠습니다."

"글로르핀델!"

그의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아챈 왕이 글로르핀델의 뺨을 잡아당겼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연신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 아무튼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렇게 날도 좋은데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요."

"저는 안에 있는 것도 불만없었습니다만, 이번 한 번만입니다."

 

하지만, 말을 하는 쪽도 듣는 쪽도 이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왕의 손을 붙잡은 금발의 영주는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복도를 달렸다. 시녀들과 시종들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근엄한 모습의 왕이 그보다 작은 영주의 손에 붙들려 끌려 다니는 것은 매번 보아도 신기한 일이었다. 글로르핀델의 발이 얼마나 빨랐던지, 따라가는 투르곤 쪽이 바쁠 정도였다. 긴 소맷자락이 왕이 움직일 때마다 팔랑거렸다.

 

 

펜골로드에 이어 이제 펜로드까지 등장했습니다. 신군 커플은 여전히 자기들만이 세상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Posted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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