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돌린 및 인물 설정 날조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櫻色舞うころ : 연분홍빛 춤출무렵

 

 

"폐하, 벌써 벚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네. 봄이니까 그렇지요. 왕궁 근처에도 벚나무가 많으니 오시는 길에 보셨나 봅니다."

 

글로르핀델은 오늘도 곤돌린의 왕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투르곤은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능숙하게 서류들을 읽어 내렸다. 왜 그리 할 일이 많은지 하루도 게을리 한 적은 없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책상 위, 책상 옆에까지 서류들이 쌓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왕은 상당히 성실했고, 일처리 하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하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벚꽃 아래를 함께 걷고 싶었지만, 왕은 전혀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죠? 그럼 잠시만 나갔다 오시죠."

"글로르핀델이나 나가시면 되겠네요."

 

왕은 손을 잡아끄는 글로르핀델의 행동에도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어코 뒤로 돌아온 글로르핀델이 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잉크와 종이의 향이 났다. 그가 그리 좋아하는 향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희미하게 섞인 입욕제의 향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소리를 내어 왕의 뒷목을 핥기 시작했다. 혀가 닿을 때마다 간질거려 투르곤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하세요...읏..."

투르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글로르핀델이 그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그만하시라고 했죠."

옆에 있던 책을 든 투르곤이 글로르핀델의 머리 위를 툭툭 쳤다.

 

"책으로 때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집무실에서 이러는 건 괜찮습니까."

그는 글로르핀델이 떨어지자 손을 들어 목 뒤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피부는 살짝 부풀어있었다. 그나마 머리가 길어 가려지는 게 다행이었다. 왕에게도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신하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본인도 지은 죄가 있어 고개를 다시 서류 쪽으로 돌렸다.

 

"이러기만 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글로르핀델이 왕의 옷깃에 손을 데려고 하자, 투르곤이 그 손을 쳐냈다.

 

"어젯밤에 상대해 드렸잖습니까."

"전 부족한데요."

그의 말에 왕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얼굴, 귀여운데요? 투르카노."

싱글벙글한 얼굴이 된 글로르핀델의 투르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당분간은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제가 가만히 놔두지 못할 텐데."

 

그는 간밤의 왕을 떠올렸다. 잠에서 덜 깨어서 눈가를 문지르는 것도 허공에 흐느적대던 팔도 모두 귀여웠다. 어찌나 귀여웠는지 씻어주겠다며 욕실로 끌고 들어가서는 거기에서도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꽃과 말린 과일 향의 입욕제 향이 아직도 그와 왕의 머리에서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글로르핀델의 입술이 이마에서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왕이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 손에는 급하게 처리해야 될 서류들을 든 채였다.

 

"따라오지 마시죠."

 

글로르핀델이 말리기도 전에 왕은 집무실을 나가버렸고, 혼자 방 안에 남겨진 글로르핀델은 왕의 의자에 앉았다. 이미 왕의 손을 거친 서류들은 모서리까지 딱딱 맞춰서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깃펜으로 적어내린 글씨체는 활자로 찍어낸 것처럼 정갈했다. 단정하면서도 왕을 닮아 길쭉한 글씨들은 상당히 유려한 것이었다. 그는 왕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쫓아가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겨주다가 집무실에서 뛰쳐나갔을 정도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할 일을 끝내면 궁으로 다시 들어올 테니 몇 시간 뒤에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공공 도서관도 따로 있었지만, 궁 안에는 왕의 장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개 글로르핀델이 거기까지 왕을 쫒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나마 왕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집무실에서 장서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다보니 확실히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아침부터 침실에서 일어나 바로 집무실로 들어가 버려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며칠 사이에 모두 꽃망울을 터트린 모양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한잎 두잎 흩날리는 분홍색과 흰색의 꽃잎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방해꾼도 없겠다 급할 것은 없었으니 천천히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걸어 장서관으로 향했다.

 

따로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두지는 않았지만, 3층으로 된 장서관의 가장 꼭대기의 구석진 곳이 왕이 주로 있는 곳이었다. 3층의 구석진 자리는 퀘냐로 된 자료들만 있어 학자들이 아니면 잘 올라오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언어학에 관련된 딱딱한 책들만 있었으니, 가끔씩 오는 학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오는 이가 드물었고, 왕에게는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예상대로 책장 사이의 의자도 탁자도 모두 비어 있었다. 엉겁결에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글로르핀델이 서류를 흐트러트리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나름대로 그도 영주인지라 중요한 서류들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복수삼아 기껏 정리해 둔 것 서류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고는 했던 것이다. 왕은 그가 제발 순순히 방을 나갔기를 바라며 의자 위에 앉았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장서관의 서편이었다. 동편에는 창들이 무수히 많았고, 거기에서 들어오는 빛이 눈이 부셔 무언가를 보기에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동쪽에는 책을 읽다 지친 이들이 잠시 쉴 수 있게 기다란 의자들이 커다란 창들 아래에 잔뜩 놓여있었다. 한참을 서류들과 씨름하다보니 그럭저럭 급히 처리해야할 일들은 끝낼 수 있었다. 왕의 인장이야 챙겨 나오지 못했지만, 다시 들어가서 찍으면 되었다. 혼자 있으면 그나마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일들도 글로르핀델이 있을 때면, 두 배나 세배 정도 처리 속도가 느려졌다. 일부러 신경을 꺼 보려고 해도 툭툭 한 마디씩 던지고, 근처에 다가오는 통에 일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서류를 챙겨든 왕은 집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집무실은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의자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가기 전과 바뀐 게 없었다. 글로르핀델이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책상 위는 예상보다는 멀쩡했다. 서류를 몇 개 들추어본 것을 제외하면, 사라지거나 순서가 바뀐 것도 없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순순히 나갔나 싶었다. 반대로 돌아간 의자를 돌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미리 표시해둔 인장을 찍어야 할 곳에 인장까지 다 찍었으니 오늘 안에 해야 할 일들은 그럭저럭 끝난 셈이었다. 그 사이 창 밖에는 석양이 내리 깔리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간밤에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인지 작게 하품이 나왔다. 식사를 하고 다시 봐야할 것 들이 있었다. 왕은 잠을 깨려면, 잠시 정원이라도 산책을 해야겠다 싶었다. 다소 불편한 정복을 갈아입고 좀 더 편한 복장이 된 왕이 정원으로 가려고 앞뜰을 나선 순간 손목을 낚아채는 자가 있었다. 누구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곤돌린 왕의 손목을 잡아챌 만한 것은 누이인 아레델이나 그의 황금빛 영주가 아니면 없었다.

 

"아직도 안에 계실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세요?"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손목을 잡은 단단한 손을 떼어낸 투르곤이 살며시 미소를 띄웠다. 낮에는 어떻게든 일을 방해하려 드는 신하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가 정말로 글로르핀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먼 땅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와 준 충직한 자였으며, 아마도 곤돌린 안에서도 누구보다 왕을 아끼고 있을 존재였다. 행동 방식을 꿰고 있어서 지금쯤이면 왕이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투르카노니까. 폐하의 얼굴만 보아도 지루할리가 없지요."

 

이렇게 말한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 빛이 하도 화사해서 피곤함마저 달아나 버릴 정도였다. 정원까지 걸어가려 했지만, 궁전의 뒤뜰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있었고, 뒤뜰을 걷다보면 졸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둘은 벚꽃이 흩날리는 뒤뜰을 천천히 거닐었다. 머리카락 위에 미풍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연신 떨어졌다.

 

"꽃들도 폐하를 알아보나보네요."

 

키가 큰 투르곤의 머리카락에는 유독 많은 꽃잎들이 얹혀 있었다. 가지 끄트머리가 왕의 머리에 스쳐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왕이 머리를 흔들자 사방으로 꽃잎들이 흩어졌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날리는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고왔다. 잠시 공중에 떠 있는 꽃잎들이 그림속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바쁜 일은 이제 없으시죠?"

"그렇다고 식사 후에 또 찾아오지는 마세요. 요즘 한가하신가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제게 찾아오시다니."

 

조용히 걷기만 하려고 했지만, 글로르핀델은 쉬지도 않고 왕에게 말을 붙였다.

 

"폐하께서 날이 갈수록 귀여워지시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제게 귀엽다고 하는 건 글로르핀델밖에 없습니다. 뭐가 그리 귀여우십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게 귀엽다는 거지요."

 

서쪽 땅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그에게 귀엽다는 말을 하는 건 글로르핀델 정도 밖에 없었다. 엄연히 곤돌린의 군주였음에도 왕의 어린 모습을 보았던 글로르핀델에게는 여전히 어린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게 귀여워하시는 소원이나 들어주시렵니까."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 투르곤이 먼저 말을 돌렸다.

 

"무슨 소원이신데요? 먼저 듣고 나서 결정하겠습니다."

왕의 말임에도 스스럼없이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호기로운 대답이었다. 그만큼 왕을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투르곤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좀처럼 부탁을 하는 일이 없는 자신의 말에 설레는 얼굴이 된 글로르핀델이 신기한 탓도 있었다.

 

"누이의 반려나 어서 찾아주세요."

그에게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누이 아레델이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을 가진 고운 누이였지만, 만만치 않은 성격 탓에 쉽게 접근하는 사내들이 없었다.

 

"그건 저도 무리입니다. 공주님께 청혼했다가 퇴짜 맞은 영주들이 몇 명인지 알면서 그러십니까."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곤돌린 각 가문의 영주들 중에 상당수가 아레델에게 청혼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하기만 했다. 남자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그녀였지만, 결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제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누이인데."

"폐하께서 얼마나 이릿세 공주님을 사랑하시는지야 제가 잘 알지요. 이드릴 공주님이 섭섭해 하시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딸아이와는 다르지요. 하나밖에 없는 누이인걸. 딸아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끼고 있는걸요."

왕은 어머니도 없이 홀로 자신의 곁을 지키는 그의 딸을 무척이나 아꼈다. 핏줄에게라면 유독 약한 요정들이었고,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형이 아닌 가족은 누이와 딸 밖에 없었기에, 왕은 그 둘에게는 무엇이든 해 주려고 할 정도였다.

 

"신기하십니다. 제게는 형제자매가 없으니 폐하가 이렇게 가족들에게 끔찍한 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글로르핀델도 자신의 가족을 가지면 알게 될 겁니다.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입니다."

투르곤의 말에 왕의 곁에서 걷던 글로르핀델이 우뚝 멈추어 섰다.

 

"제가 가정을 가지시면 좋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보통 결혼을 하실 나이가 한참 지나기는 했지만, 평화로운 왕국 안이니 가정을 가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요."

태연스러운 왕의 얼굴에 글로르핀델은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속도 좋으십니다. 제가 결혼을 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충직한 영주의 결혼인데 마땅히 축복해 드릴 일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밤마다 제게 찾아오실 일도 없으실 겁니다."

이번에는 보통 때와는 달리 그가 왕에게 놀림을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글로르핀델은 목이 쉴 때까지 자신의 이름만 부르게 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하며, 투르곤의 뺨에 손을 올렸다.

 

"투르카노."

잔잔한 목소리였다. 장난기가 가신 얼굴을 본 투르곤도 그의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제가 당신을 두고 결혼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까지 지키겠지만, 누구와도 결혼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게는 당신밖에 없으니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매끈한 얼굴선을 천천히 쓸던 그의 얼굴이 다시 언제나처럼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이 글로르핀델의 선택이라면, 제가 참견할 바는 아니겠지요."

왕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눈에 익은 아치가 나타났다. 그들은 뒤뜰을 한 바퀴 돌아서 처음의 장소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왕은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돌아서서 먼저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더니 글로르핀델의 심정이 딱 그와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왕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휘둘리고 있는 것은 자신 쪽이었다.

 

 

가끔은 관계 전환도 시켜보고 싶었습니다.

Posted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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