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별똥별 (수정 中)

 

 

오늘도 곤돌린의 왕은 별이 총총하게 박힌 밤까지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잠자리에 들어도 아무도 그를 탓하는 자는 없었지만, 왕은 자신을 휘몰아치는 편이어서 보통은 새벽녘이 되기 전에는 잠드는 일이 드물었다. 자정도 지난 시간에 글로르핀델은 왕의 침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복도를 오가는 시종들도 적거니와 비밀통로를 통해 들어온 것이라 그가 들어오는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문을 대뜸 열어젖힌 그는 창가에 안아있는 왕에게 달려왔다. 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금발의 영주가 왕에게 달려오는 일은 흔하다 못해 일상적인 일이었다. 막상 침의로 갈아입었지만, 잠이 잘 오지 않아 챙겨온 일들을 하던 참이었다.

 

부둥켜 안으려는 글로르핀델을 책으로 밀어낸 투르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쩔수 없이 글로르핀델도 왕의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자신을 봐주지 않는 것은 아쉬웠지만, 일에 몰두하고 있는 왕의 옆모습을 보는 건 충분히 즐거웠다.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를 응시하는 눈이나 책상 위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머리카락을 넘길 때마다 드러나는 목선 같은 것들에서 그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의식 중에 손이 왕에게 향한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투르곤은 별 반응이 없었다.

 

"별똥별이 떨어집니다. 폐하."

 

그들은 창가에 있었는데, 창 밖으로는 남색으로 변한 밤하늘이 있었다. 왕의 침실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었다. 산맥 너머로 보이는 티끌하나 없는 하늘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달과 별만이 있는 하늘에 갑자기 길게 선을 그리는 것이 있었다. 별똥별이었다. 글로르핀델이 그것을 보고 투르곤의 어깨를 쳤다. 그래도 투르곤은 담담하게 대답을 할 뿐이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떠는 그라서 일일이 반응을 해 줄수는 없었다. 

 

"그래. "

"아무 소원도 안 비실겁니까?"

 

이미 몇 천살씩이나 먹고서 아이들처럼 별똥별에 소원을 빌자고 하는 글로르핀델을 왕이 슬쩍 돌아보았다. 금발의 요정은 당연한 말을 했는데 왜 보냐는 듯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의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그의 평소의 모습과는 참으로 달라서 투르곤은 마음속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다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왕이 웃기라도 하면, 글로르핀델은 왜 웃는거냐고 하면서 대화가 길게 이어질 것이다. 슬슬 가져온 일도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은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내가 왜..."

"보세요. 또 떨어집니다."

 

왕은 창을 등지고 있어서 뒤돌지 않으면 창밖을 볼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글로르핀델이 아예 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양피지 위에 글씨를 쓰던 왕은 그 바람에 다시 새로운 양피지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위로 쭉 검은 선이 그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거의 다 써가고 있었는데, 글로르핀델 덕분에 다시 새로 써야했다. 왕의 다른 형제들이었다면, 아마도 그와 당장 말싸움을 했을 것이다.

 

 

"계속 방 안에 있으려면 가만히 있든지, 아니면 나가든지."

"투르카노도 얼른 소원 비세요. 별똥별이 맨날 떨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투르곤은 약간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관대한 왕이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었다. 왕의 말에도 글로르핀델은 꿋꿋했다. 투르곤이 창을 한 번 돌아보기 전에는 성가시게 구는 것을 멈추지 않을 듯 했다. 별똥별이 매일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수도 없이 별똥별이 하늘을 가르는 것을 보았는데 뭐가 그리 특별하다는지 호들갑을 떠는 글로르핀델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굳이 소원 같은 거 빌지 않아도 전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곁에 있지 않는 건 애석한 일이었지만, 자신의 몸처럼 아끼는 누이와 아내를 빼어닮은 딸과 충성스러운 영주들에 그를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까지. 아버지나 형과는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었지만, 왕은 정말로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이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더한 것을 바라고 싶지는 않았다.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손 안에 있는 것만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진심이십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글로르핀델은 대체 무슨 소원을 빌었길래 이렇게 유별나게 구시는 겁니까."

"당연히 비밀이죠."

 

왕의 말에 글로르핀델은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자신이 왕을 방해하고 있다는 인식이라고는 조금이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태연했다. 참다 못한 왕이 글로르핀델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이 일어섰음에도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으며 집게 손가락을 흔들 뿐이었다. 흥분해 봤자 자신만 바보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든 투르곤이 창문에 달린 커튼을 내려버렸다. 밖이 보이지 않으면, 더는 저렇게 시끄럽게 구지는 못할 것 같았다. 왕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쳐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을 정도였다.

 

"자, 그럼 소원도 다 비셨으니까 얌전히 앉아 계시죠."

"커튼을 치면 창 밖이 안 보이지 않습니까!"

 

붉은색 벨벳으로 된 두꺼운 커튼을 치고 틈새마저 리본으로 단단히 매듭을 지은 투르곤이 흡족한 표정으로 글로르핀델을 돌아보았다. 이러면 더는 밖을 보라는 소리는 못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에 글로르핀델이 책상을 탕 쳤다.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이 흔들려서 아예 엎어져 버렸다. 당연스럽게도 왕이 방에 들어와서부터 계속 하고 있던 일이 물거품이 되었다. 검은색 잉크가 양피지 위를 시커멓게 물들여 버렸다. 글로르핀델의 시선은 왕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왕은 책상 위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잠자리에까지 일을 가져왔는지 탄식이 나올 지경이었다.

 

"더 보시고 싶으시면 나가시면 됩니다. 방 안이 조용해질테니 저야 그 편이 좋습니다."

 

애써 미소를 지은 왕이 글로르핀델의 어깨를 밀었지만, 그는 도리어 왕의 어깨를 잡아 끌어서 침대로 데려갔다. 이대로 두면 밤을 새울 게 뻔했다. 밤샘을 한다고 피곤함을 드러낼 왕도 아니었지만, 그로써는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재촉하는 이도 없는데 왜 이리 열성인지 글로르핀델이 염려를 할 정도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차라리 잉크를 엎은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만 주무세요. 어차피 가져오신 일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할테니까 마저 할 생각은 포기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자도 몇 시간 뒤면 일어나야 될텐데 피곤할 겁니다."

 

그의 손길을 물리치려는 왕을 침대 속으로 밀어 넣은 글로르핀델은 목까지 이불로 덮어버렸다. 꼼짝없이 침대 속에 갇힌 꼴이 된 투르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감았다. 잘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푹신한 침대에 누우니 서서히 잠이 몰려드는 것 같기도 했다. 글로르핀델은 침대 옆에 앉아서 왕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속눈썹이 촘촘했다. 막 잠이 들려는데 깨우면 안 될 것 같아 그는 왕의 뺨에만 살짝 입술을 스쳤다. 이대로 바로 나가버리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버릴테니 잠드는 모습을 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주무세요? 투르카노?"

 

작게 이름을 불렀지만, 투르곤은 대답이 없었다.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을 때는 일을 다 끝내기 전에는 자지 않을 것 같더니 피곤했는지 생각보다 금방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그는 창가로 가서 커튼의 매듭을 풀었다. 그래도 왕은 깨어나지 않았다. 창 밖에서는 아직도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점점 간격이 뜸해지더니 굉장히 밝은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다. 글로르핀델은 그 순간 소원을 빌었다. 엘베레스 길소니엘, 곧 별들의 여왕인 바르다를 찬양하며 자신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기원했다. 다시 커튼을 닫은 그가 잠들어 있는 투르곤게 천천히 다가갔다. 지극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글로르핀델의 손이 잠시 잠든 이의 이마에 얹혔다. 그는 하나뿐인 주군이 이 밤 내내 평안하길 바라고 있었다.

 

 

진단메이커에서 본 별똥별이라는 소재가 인상 깊어서 짧게 적어보았습니다.

Posted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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