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돌린 및 인물 설정 날조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櫻色舞うころ : 연분홍빛 춤출무렵

 

 

"폐하, 벌써 벚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네. 봄이니까 그렇지요. 왕궁 근처에도 벚나무가 많으니 오시는 길에 보셨나 봅니다."

 

글로르핀델은 오늘도 곤돌린의 왕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투르곤은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능숙하게 서류들을 읽어 내렸다. 왜 그리 할 일이 많은지 하루도 게을리 한 적은 없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책상 위, 책상 옆에까지 서류들이 쌓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왕은 상당히 성실했고, 일처리 하는 것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신하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벚꽃 아래를 함께 걷고 싶었지만, 왕은 전혀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렇죠? 그럼 잠시만 나갔다 오시죠."

"글로르핀델이나 나가시면 되겠네요."

 

왕은 손을 잡아끄는 글로르핀델의 행동에도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기어코 뒤로 돌아온 글로르핀델이 왕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잉크와 종이의 향이 났다. 그가 그리 좋아하는 향은 아니었지만, 거기에 희미하게 섞인 입욕제의 향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소리를 내어 왕의 뒷목을 핥기 시작했다. 혀가 닿을 때마다 간질거려 투르곤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만하세요...읏..."

투르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글로르핀델이 그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그만하시라고 했죠."

옆에 있던 책을 든 투르곤이 글로르핀델의 머리 위를 툭툭 쳤다.

 

"책으로 때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집무실에서 이러는 건 괜찮습니까."

그는 글로르핀델이 떨어지자 손을 들어 목 뒤쪽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피부는 살짝 부풀어있었다. 그나마 머리가 길어 가려지는 게 다행이었다. 왕에게도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신하가 괘씸하기도 했지만, 본인도 지은 죄가 있어 고개를 다시 서류 쪽으로 돌렸다.

 

"이러기만 하는 것도 아닐 텐데요."

글로르핀델이 왕의 옷깃에 손을 데려고 하자, 투르곤이 그 손을 쳐냈다.

 

"어젯밤에 상대해 드렸잖습니까."

"전 부족한데요."

그의 말에 왕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얼굴, 귀여운데요? 투르카노."

싱글벙글한 얼굴이 된 글로르핀델의 투르곤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당분간은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제가 가만히 놔두지 못할 텐데."

 

그는 간밤의 왕을 떠올렸다. 잠에서 덜 깨어서 눈가를 문지르는 것도 허공에 흐느적대던 팔도 모두 귀여웠다. 어찌나 귀여웠는지 씻어주겠다며 욕실로 끌고 들어가서는 거기에서도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꽃과 말린 과일 향의 입욕제 향이 아직도 그와 왕의 머리에서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글로르핀델의 입술이 이마에서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왕이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 손에는 급하게 처리해야 될 서류들을 든 채였다.

 

"따라오지 마시죠."

 

글로르핀델이 말리기도 전에 왕은 집무실을 나가버렸고, 혼자 방 안에 남겨진 글로르핀델은 왕의 의자에 앉았다. 이미 왕의 손을 거친 서류들은 모서리까지 딱딱 맞춰서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깃펜으로 적어내린 글씨체는 활자로 찍어낸 것처럼 정갈했다. 단정하면서도 왕을 닮아 길쭉한 글씨들은 상당히 유려한 것이었다. 그는 왕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었다. 하지만 쫓아가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겨주다가 집무실에서 뛰쳐나갔을 정도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할 일을 끝내면 궁으로 다시 들어올 테니 몇 시간 뒤에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공공 도서관도 따로 있었지만, 궁 안에는 왕의 장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대개 글로르핀델이 거기까지 왕을 쫒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나마 왕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집무실에서 장서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집무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다보니 확실히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아침부터 침실에서 일어나 바로 집무실로 들어가 버려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며칠 사이에 모두 꽃망울을 터트린 모양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한잎 두잎 흩날리는 분홍색과 흰색의 꽃잎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방해꾼도 없겠다 급할 것은 없었으니 천천히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걸어 장서관으로 향했다.

 

따로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두지는 않았지만, 3층으로 된 장서관의 가장 꼭대기의 구석진 곳이 왕이 주로 있는 곳이었다. 3층의 구석진 자리는 퀘냐로 된 자료들만 있어 학자들이 아니면 잘 올라오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 중에서도 언어학에 관련된 딱딱한 책들만 있었으니, 가끔씩 오는 학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오는 이가 드물었고, 왕에게는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예상대로 책장 사이의 의자도 탁자도 모두 비어 있었다. 엉겁결에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글로르핀델이 서류를 흐트러트리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되었다. 나름대로 그도 영주인지라 중요한 서류들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복수삼아 기껏 정리해 둔 것 서류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놓고는 했던 것이다. 왕은 그가 제발 순순히 방을 나갔기를 바라며 의자 위에 앉았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장서관의 서편이었다. 동편에는 창들이 무수히 많았고, 거기에서 들어오는 빛이 눈이 부셔 무언가를 보기에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동쪽에는 책을 읽다 지친 이들이 잠시 쉴 수 있게 기다란 의자들이 커다란 창들 아래에 잔뜩 놓여있었다. 한참을 서류들과 씨름하다보니 그럭저럭 급히 처리해야할 일들은 끝낼 수 있었다. 왕의 인장이야 챙겨 나오지 못했지만, 다시 들어가서 찍으면 되었다. 혼자 있으면 그나마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일들도 글로르핀델이 있을 때면, 두 배나 세배 정도 처리 속도가 느려졌다. 일부러 신경을 꺼 보려고 해도 툭툭 한 마디씩 던지고, 근처에 다가오는 통에 일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서류를 챙겨든 왕은 집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집무실은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의자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나가기 전과 바뀐 게 없었다. 글로르핀델이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책상 위는 예상보다는 멀쩡했다. 서류를 몇 개 들추어본 것을 제외하면, 사라지거나 순서가 바뀐 것도 없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순순히 나갔나 싶었다. 반대로 돌아간 의자를 돌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미리 표시해둔 인장을 찍어야 할 곳에 인장까지 다 찍었으니 오늘 안에 해야 할 일들은 그럭저럭 끝난 셈이었다. 그 사이 창 밖에는 석양이 내리 깔리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간밤에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인지 작게 하품이 나왔다. 식사를 하고 다시 봐야할 것 들이 있었다. 왕은 잠을 깨려면, 잠시 정원이라도 산책을 해야겠다 싶었다. 다소 불편한 정복을 갈아입고 좀 더 편한 복장이 된 왕이 정원으로 가려고 앞뜰을 나선 순간 손목을 낚아채는 자가 있었다. 누구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곤돌린 왕의 손목을 잡아챌 만한 것은 누이인 아레델이나 그의 황금빛 영주가 아니면 없었다.

 

"아직도 안에 계실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이세요?"

"지겹지도 않으십니까."

 

손목을 잡은 단단한 손을 떼어낸 투르곤이 살며시 미소를 띄웠다. 낮에는 어떻게든 일을 방해하려 드는 신하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가 정말로 글로르핀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먼 땅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와 준 충직한 자였으며, 아마도 곤돌린 안에서도 누구보다 왕을 아끼고 있을 존재였다. 행동 방식을 꿰고 있어서 지금쯤이면 왕이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으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투르카노니까. 폐하의 얼굴만 보아도 지루할리가 없지요."

 

이렇게 말한 그는 환하게 웃었다. 그 빛이 하도 화사해서 피곤함마저 달아나 버릴 정도였다. 정원까지 걸어가려 했지만, 궁전의 뒤뜰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는 약간 시간이 남아있었고, 뒤뜰을 걷다보면 졸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둘은 벚꽃이 흩날리는 뒤뜰을 천천히 거닐었다. 머리카락 위에 미풍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연신 떨어졌다.

 

"꽃들도 폐하를 알아보나보네요."

 

키가 큰 투르곤의 머리카락에는 유독 많은 꽃잎들이 얹혀 있었다. 가지 끄트머리가 왕의 머리에 스쳐지나가기 때문이었다. 왕이 머리를 흔들자 사방으로 꽃잎들이 흩어졌다.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날리는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고왔다. 잠시 공중에 떠 있는 꽃잎들이 그림속의 한 장면과도 같았다.

 

"바쁜 일은 이제 없으시죠?"

"그렇다고 식사 후에 또 찾아오지는 마세요. 요즘 한가하신가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제게 찾아오시다니."

 

조용히 걷기만 하려고 했지만, 글로르핀델은 쉬지도 않고 왕에게 말을 붙였다.

 

"폐하께서 날이 갈수록 귀여워지시는 것을 어쩌겠습니까."

"제게 귀엽다고 하는 건 글로르핀델밖에 없습니다. 뭐가 그리 귀여우십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게 귀엽다는 거지요."

 

서쪽 땅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그에게 귀엽다는 말을 하는 건 글로르핀델 정도 밖에 없었다. 엄연히 곤돌린의 군주였음에도 왕의 어린 모습을 보았던 글로르핀델에게는 여전히 어린 아이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게 귀여워하시는 소원이나 들어주시렵니까."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 투르곤이 먼저 말을 돌렸다.

 

"무슨 소원이신데요? 먼저 듣고 나서 결정하겠습니다."

왕의 말임에도 스스럼없이 들어보고 결정하겠다는 호기로운 대답이었다. 그만큼 왕을 친근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투르곤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좀처럼 부탁을 하는 일이 없는 자신의 말에 설레는 얼굴이 된 글로르핀델이 신기한 탓도 있었다.

 

"누이의 반려나 어서 찾아주세요."

그에게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누이 아레델이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을 가진 고운 누이였지만, 만만치 않은 성격 탓에 쉽게 접근하는 사내들이 없었다.

 

"그건 저도 무리입니다. 공주님께 청혼했다가 퇴짜 맞은 영주들이 몇 명인지 알면서 그러십니까."

글로르핀델의 말처럼 곤돌린 각 가문의 영주들 중에 상당수가 아레델에게 청혼을 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랭하기만 했다. 남자들과 친구처럼 어울리는 그녀였지만, 결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제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누이인데."

"폐하께서 얼마나 이릿세 공주님을 사랑하시는지야 제가 잘 알지요. 이드릴 공주님이 섭섭해 하시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딸아이와는 다르지요. 하나밖에 없는 누이인걸. 딸아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아끼고 있는걸요."

왕은 어머니도 없이 홀로 자신의 곁을 지키는 그의 딸을 무척이나 아꼈다. 핏줄에게라면 유독 약한 요정들이었고,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아버지와 형이 아닌 가족은 누이와 딸 밖에 없었기에, 왕은 그 둘에게는 무엇이든 해 주려고 할 정도였다.

 

"신기하십니다. 제게는 형제자매가 없으니 폐하가 이렇게 가족들에게 끔찍한 게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글로르핀델도 자신의 가족을 가지면 알게 될 겁니다.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입니다."

투르곤의 말에 왕의 곁에서 걷던 글로르핀델이 우뚝 멈추어 섰다.

 

"제가 가정을 가지시면 좋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확실히 보통 결혼을 하실 나이가 한참 지나기는 했지만, 평화로운 왕국 안이니 가정을 가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요."

태연스러운 왕의 얼굴에 글로르핀델은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속도 좋으십니다. 제가 결혼을 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충직한 영주의 결혼인데 마땅히 축복해 드릴 일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밤마다 제게 찾아오실 일도 없으실 겁니다."

이번에는 보통 때와는 달리 그가 왕에게 놀림을 받는 모양새가 되었다. 글로르핀델은 목이 쉴 때까지 자신의 이름만 부르게 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하며, 투르곤의 뺨에 손을 올렸다.

 

"투르카노."

잔잔한 목소리였다. 장난기가 가신 얼굴을 본 투르곤도 그의 손을 내치지는 않았다.

 

"제가 당신을 두고 결혼할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까지 지키겠지만, 누구와도 결혼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게는 당신밖에 없으니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매끈한 얼굴선을 천천히 쓸던 그의 얼굴이 다시 언제나처럼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것이 글로르핀델의 선택이라면, 제가 참견할 바는 아니겠지요."

왕이 그렇게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눈에 익은 아치가 나타났다. 그들은 뒤뜰을 한 바퀴 돌아서 처음의 장소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왕은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돌아서서 먼저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더니 글로르핀델의 심정이 딱 그와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가 왕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휘둘리고 있는 것은 자신 쪽이었다.

 

 

가끔은 관계 전환도 시켜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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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르핀델x핀골핀)

썰들 2014. 3. 16. 21:25

아만 시절

 

 

(글로르핀델x핀골핀)

 

 

글로르핀델은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이제 제법 자라있었다. 소년은 동생처럼 눈부신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온화하고 조용한 동생에 비하면,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유쾌해질 정도로 상당히 다른 성격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소년은 마치 제가 핀골핀의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가 황금꽃 가문의 저택에 방문할 때면, 즐거운 목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그래도 어린애처럼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형님을 보다 글로르핀델을 만날 때가 좋았다. 소년의 싱그러운 웃음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릴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냥 얌전하기만 한 건 아니었으나, 야단을 치려다가도 웃음이 나오고 빙그레 미소를 짓게 되었다.

 

"아라카노, 오늘은 저 쪽으로 가보지 않겠어요?"

 

소년은 금발을 흩날리며 핀골핀의 옆쪽으로 달려왔다. 형인 페아노르와는 정답게 사냥을 나올 일이 없었고, 동생인 피나르핀은 누이들과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자연스레 다른 자들과 사냥을 나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 가장 자주 함께하는 것이 글로르핀델이었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핀웨의 저택을 드나들었고, 핀골핀이 아나이레와 결혼한 뒤에도 친동생이라도 된 마냥 저택에 들르고는 했다. 두 부부만이 사는 저택이라 다른 이가 찾아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식사라도 하고 가요. 글로르핀델"

"감사합니다. 아나이레님."

 

핀골핀의 아내인 아나이레도 금발의 소년이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양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아직 그들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어서 셋이서 함께 식사를 할 때면 가족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소년이 음식이 담긴 그릇을 엎지르기라도 하면 핀골핀은 자신이 아버지라도 된 것처럼 잔소리 몇 마디를 했고, 아나이레가 곧 새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언제나 서글서글하게 웃는 소년은 핀골핀을 친형이라도 되듯 친근하게 아라카노라고 불렀다. 이복형인 페아노르와 다르게 그가 부르는 이름에는 친애의 감정이 가득해서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소년의 안내를 따라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녹음이 짙어졌다. 라우렐린의 금빛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짙은 녹색 빛이었다. 공기는 한층 맑았지만,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길은 알고 있냐고 물었지만, 글로르핀델은 핀골핀의 말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리 와 보실래요?"

 

소년이 가리킨 쪽에는 자그마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점점 서늘한 느낌이 든다 싶더니 물이 흐르고 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미 와 본적이 있는 듯 소년은 익숙하게 신발을 벗어던지더니 물속에 들어갔다. 씨익 웃은 글로르핀델은 핀골핀을 향해 물을 뿌렸다. 가만히 서 있으려고 했는데, 계속 해서 들어오라는 듯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핀골핀도 등에 맨 활과 화살통을 내려두고, 신발을 벗은 채 물 속으로 들어갔다. 보기보다 차가운 시냇물이었지만, 시원해서 복잡했던 머릿속이 절로 맑아지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물을 튀기고, 얼굴에 튄 물을 닦아 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 정신없이 물장구를 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소년이 핀골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는데, 물속으로 걸어온 소년이 핀골핀에게 두 눈을 감으라고 했다. 뭘 하려는 거냐고 물었지만, 글로르핀델은 아무 답도 없이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핀골핀이 눈을 감지 않자, 소년이 양손을 들어 올려 핀골핀의 눈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소년의 금발과 얼굴이 사라져 버렸을까, 이마에 따스한 온기가 번졌다. 부드러운, 금색의 빛과도 같은 온기였다.

 

"어떤가요?"

 

다시 눈을 뜨니 조금 위쪽에 있었던 소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보였다. 핀골핀은 장난치지 말라고 하며 글로르핀델의 이마를 주먹으로 꾹 눌렀다. 소년은 살짝 붉은 자국이 남은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물속에 계속 발을 담그고 있으려니 슬슬 추워질 것 같았다. 그 사이에 핀골핀이 물속에서 나가려고 몸을 돌렸는데, 소년이 그의 등을 껴안았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것 같이 친밀함이 가득한 동작이었다. 핀골핀은 소년이 귀찮지는 않았지만,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등에 매달려 있는 두개의 팔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글로르핀델은 그의 등에 얼굴을 묻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참 좋네요."

 

어느 새, 소년은 그도 쉽게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자라있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키도 부쩍 자라서 핀골핀과 눈높이가 얼추 비슷해졌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 소년에 비하면 핀골핀 쪽이 키도 더 크고 힘도 더 세었다. 마침내 소년을 떼어낸 그가 글로르핀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의 손에는 상대가 아프지 않게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 입가에는 가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친동생보다 더 형처럼 자신을 대하는 소년이 귀엽다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많이 심심했나 보네."

 

그의 얼굴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고, 글로르핀델 역시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였다.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은 일렀다. 그래도 그는 이미 자라버렸다. 핀골핀에는 미치지 못할 지라도 어린 날의 그는 아니었다. 저 얼굴이 어떻게 변할 지 궁금했다. 단정한 얼굴이 흐트러질 만한 일이 생긴다면, 그 때는 지금처럼 태연한 얼굴로 웃어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그도 핀골핀도 알 수 없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향하자 문득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혼자서 신이 난 글로르핀델을 마주한 핀골핀은 별 싱거운 녀석 다 보겠다는 듯 풀어두었던 화살과 화살통을 주워들었다. 아직까지 잡은 동물 한 마리 없었으니 이제부터 사냥에 집중해야 했다.

 

 

금화공 성격은 아직도 헷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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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시대 1499년 경 (엘렌웨 사후, 헬카락세)


횡단 과정이 어땠는지는 멋대로 상상했습니다.



[실마릴리온/투르곤] 헬카락세



바깥에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불이 피워져 있는 막사 안에는 온기가 머물고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인 건 아니었다. 투르곤은 며칠 째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의 딸은 이미 오래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모인 이드릴의 막사에 머물고 있었다. 졸지에 어머니를 잃어버렸지만, 생각보다 씩씩하게 이려내려 하고 있었다. 글로르핀델은 그녀를 딱하게 여겼다. 아버지가 곁에 있지만, 어머니가 없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금발의 영주는 눈을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인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토록 평정을 잃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이일 때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투르곤은 어른스러운 모습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모두 있었으니 어리광을 부려도 뭐라 할 자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는 왕자의 차가운 뺨을 쓸었다. 처음 막사로 옮겼을 때 보다는 체온이 돌아와 있었다. 오열하며 눈물을 쏟아내던 왕자는 형이 그를 일으켜 세우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쭉 이런 상태였다. 처음에는 워낙 체온이 낮아져 있어 어의도 오늘을 넘길 수 있을 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빙하가 녹아내린 저 찬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셨는데..."


닦달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혹한의 빙하 속에서는 바로 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는 다른 부분의 빙하마저 녹아내릴지 몰랐다. 막사를 세우고 나서야 재빠르게 불을 피우고, 막사 안에 왕자를 데려다 놓았다.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간이 침대 밖에 없었다. 두터운 이불을 모아와서 몇 겹이나 덮어주고 온 종일 그가 곁에서 머물렀다. 


투르곤의 아버지인 핀골핀은 정이 없는 자가 아니었지만, 백성들을 돌보는 걸 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이미 사망한 자가 하나 둘인 건 아니었지만, 왕자의 아내가 죽은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백성들 사이에 크게 동요가 일었고,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제와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자는 자도 없었지만, 처음의 의욕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였다.


글로르핀델은 다시 투르곤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이마를 닦아주다 보니 어느새 흰 천이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왕자는 때로 악몽을 꾸는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입 밖에 내였다. 그러나 살작 흔들어보아도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았다. 긁힌 상처하나 없었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그가 다시 막사로 돌아왔을 때, 투르곤은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정면을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글로르핀델마저 그가 드디어 깨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릴 정도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간이 침대 옆으로 다가가 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투르카노."


답이 없었다.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듯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가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투르곤은 마지 못해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마주한 눈에는 어떠한 것도 없었다. 어두운 푸른색의 눈동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어떠한 감정도, 심지어 살아 있다는 생기마저도 없었다. 시선을 맞추고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웠다. 


"요깃거리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그렇게 말한 글로르핀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머리에 손을 대자마자 투르곤이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이 사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경악과 공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괜찮습니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건..."


 그는 글로르핀델을 향해 손을 휘저었지만, 그 손은 글로르핀델의 손에 닿지 못했다. 극심한 충격에 스스로 닫아버린 것처럼 투르곤의 눈동자에는 어떤 것도 비치지 않는 듯 했다. 요정들에게 아내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자는 눈 앞에서 아내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글로르핀델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정인조차 가져 본 적이 없어서 더욱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시각이 차단된다는 건 상당히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분명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데도 깜깜한 어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새카만 어둠은 물 속에 잠겨 있었을 때를 생각나게 했다. 글로르핀델은 왕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바로 남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불려온 어의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며, 체온을 유지하게 해 두라는 말만 하고 별다른 처치를 해 주지는 않았다.


다른 자들은 어련히 글로르핀델이 알아서 잘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각자가 자신을 챙기는 것만도 힘들었던 것이다. 빙하속의 행군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된 것이라 조금을 가고 나면 막사를 세우고 상당한 기간을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무리가 워낙 많은 수나 보니 처음과 끝의 거리가 지나치게 벌어지는 경우가 잦았고, 그래서 일정 거리를 지나면 정주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엘렌웨의 사망으로 갑작스레 멈추어 선 것이기는 했으나 모두가 지쳐있어서 이번에도 오랜 휴식이 될 듯 했다. 투르곤은 깨어난 날 내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법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글로르핀델을 부르지도 않았다. 음식도 먹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먹였지만, 잠시 뒤에 모두 게워내고 말았다. 


이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익숙해질 리 없었다. 기운도 없을 뿐더러 일단 눈이 보이지 않으니 투르곤도 밖에 나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탈수라도 올까 싶어 물을 조금 마시게 한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었다. 지루한 침묵의 시간이었다.


결국 다음날이 되어서야 핀골핀이 아들을 찾아왔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도 상당히 투르곤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부름에도 흘깃 시선을 주었을 뿐,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은 열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들의 손을 어루만지던 아버지의 크고 따듯한 손이 아들의 어깨 위에 얹혔다. 


"그래, 힘든 일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다른 말은 없었고, 망명 놀도르의 대왕은 다시 막사 밖으로 나갔다. 때로는 백마디의 말보다도 기다려 줄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상처를 감내할 수 있을 때 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오빠, 좀 괜찮아?"

"투르카노, 이타릴데가 널 찾고 있어."

"형님,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구경이라도 하러오듯 왕자의 형과 누이와 아우가 차례로 찾아왔지만, 그의 상태를 보고 곧 발길을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사건은 글로르핀델이 다시 식사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났다. 휑한 느낌이 드는게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급히 돌아와 보니 얌전히 있어야할 투르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는 흐트러진 이불만이 남아있었다.


막사 안에는 조그맣게 불이 피워져 있었기 때문에 투르곤은 겉옷도 걸치지 않은 한겹의 실내복 차림이었다. 혹한의 바깥에 그 상태로 나가는 건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바깥에는 눈보라까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왕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눈보라가 더 강해지기 전에 막사 속으로 들어가 있었고, 인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눈도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를 간 건지 걱정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던 시각은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깜깜함 속에서 작은 빛줄기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살아있었다. 죽지 못했다. 손과 발, 침대. 서서히 막사의 모습들이 또렷해 졌다. 줄곧 곁에 있던 글로르핀델은 자리를 비운 듯 했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밖으로 나갔는데,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도 잊은 채였다. 


밭 밑에서 느껴지는 눈의 차가움과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싸늘한 바람에 몸이 꽁꽁 얼어 붙었지만, 이를 까득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가 계속해서 서로 맞부딫쳤다. 놀도르들은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는데, 투르곤은 놀라운 감각을 발휘해서 아내가 사라져 버린 곳으로 향했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몸은 착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빙하가 깨진 모습은 그대로였다. 틈은 깊어서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한 발자국이면 되었다. 한 걸음, 단 한 걸음이면 충분했다. 다가가기 위한 한 걸음이었다. 놓친 것이 손 하나 차이였다면, 다가갈 수 있는 것도 한 걸음이면 되었다. 그가 막 찬물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었을 때, 글로르핀델이 그를 붙잡았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간발의 차이였다. 때마침 글로르핀델이 나타난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앞쪽에 있던 빙하가 떨어져 틈 사이를 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투르곤의 모습은 물 속에 잠겨 버렸을 터였다. 이제 더 이상 겉으로 드러난 틈은 없었다. 


그의 품에 안긴 왕자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가만히 있었다. 몸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급한대로 외투를 벗어 그를 감쌌다. 키는 조금 차이가 났지만, 그리 큰 차이는 아니어서 글로르핀델은 어렵지 않게 투르곤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원래라면 분홍빛에 가까워야 했을 입술은 멍이 든 것처럼 시퍼렇게 변해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한기가 느껴지는지 왕자가 심하게 몸을 떨었다. 


돌아오는 내내 눈보라가 강했다.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눈보라를 지나 그들은 가까스로 막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화로 속에 피워둔 불은 거의 다 꺼져가고 있었다. 그나마 온기가 남아 있는 막사 안은 훈훈했다.


"엘렌웨님을 이제 다시 만나실 수 없습니다."


잔인할 정도로 단호한 말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몰아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영원히 모시기로 한 주군을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이기적으로 들릴 지 몰라도 곁에 있었으면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곁을 지켜주겠습니까."


약속이었다.


"평생동안 어디든 따를겁니다."


다짐이었다.


영생을 사는 요정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이라도 괜찮았다. 군주인 핀골핀의 차남과 핀골핀 가의 가신으로 만났지만, 망명이 시작되기 전 글로르핀델은 투르곤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어째서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는지 그도 의아할 정도였다. 핀골핀은 훌륭한 군주였고, 하물며 투르곤의 형인 핀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선택한 것은 투르곤이었다. 망명에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핀골핀과 투르곤 또한 떠나게 되어서 그도 가운데 땅을 향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투르카노, 제 말 잘 들으세요."


투르곤은 버림받은 아이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저, 한 없이 약하고 부서질 것만 같았고, 글로르핀델은 그런 주군이 애처로웠다. 어떤 말이라도 해서 슬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엘렌웨님께서는 우리의 눈 앞에서는 사라졌지만, 언제나 가슴 속에 살아 계실 겁니다."


그가 투르곤의 손을 붙잡아서 가슴으로 가져다 대었다. 맞잡은 손이 함께 닿아 있었다. 조용한 막사 안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머뭇거리던 그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터져나온 말은 절규와도 같았다.


"왜 구하지 못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었다면, 구할 수 있었을 지 몰랐다. 하지만, 아차 하는 사이에 아내는 저 밑으로 가라앉아 좁은 틈에 끼었다. 품에는 아이가 있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떨어지는 과정에서 어디를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딸 아이는 의식이 없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없었지만, 아내를 포기하고 물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시죠. 그리고, 저도 당신과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물이 터져나왔다. 글로르핀델은 가족들을 떠나 그를 따라가 온 것이었다. 투르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얼굴위로 뜨거운 것이 스스로를 위로하듯 흘러내렸다. 글로르핀델은 왕자를 토닥거리며 어깨에 기대게 했다. 아마도 언제까지고 왕자는 이 빙하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도 잊지 못할 터였다.


눈물 때문에 얼굴에는 머리카락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온 글로르핀델이 투르곤을 무릎 위에 눕혔다. 조심스레 한가닥씩 머리카락을 떼어내었다. 도저히 입맛이 없다고 해서 기껏 끓인 수프는 반도 채 먹지 못했다. 글로르핀델은 떠나기 전 나무의 밝은 빛 아래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자장가를 불렀다.  악기 소리 같은 목소리가 잔잔했다.


"두 분 정말 잘어울리시는데요."


글로르핀델이 엘렌웨의 손을 꼭 잡고 산책을 하는 투르곤에게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넷다. 잠에서 깨어나면 둘은 저택의 근처를 그렇게 걸었고, 일찍부터 찾아온 글로르핀델이 눈치도 없이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제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글로르핀델님."


아담하고 솜처럼 보드라운 표정을 가진 여성이었다. 엘렌웨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하지만 보기와는 다르게 의지가 강해서, 일족 중에 아무도 망명에 따라 나서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아이와 남편을 따라 떠나겠다고 했다. 왕자의 어머니마저 아만에 남기로 결정을 내렸는데도 그랬다.


처음 빙하를 보았을 때, 모두 질겁하고 말았다. 배가 없어서 이 빙하를 지나지 않으면 페아노르의 무리를 따라갈 수 없었는데도 엄두가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만에는 겨울도 추위도 눈도 없었다. 축복받은 땅은 늘 온화했다. 모두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었다. 사방이 흰 빛이었다. 나무도 풀도 없었다. 눈이 이상해 졌나 싶을정도로 흰색 뿐이었다. 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혹한이었다. 셀 수 없이 먼 거리를 걸어왔는데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고되고 힘든 나날들이었다. 


"주무세요?"

"아니요."


글로르핀델은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투르곤이 잠이 들 때까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슬슬 목이 아파오려 했지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깨 아래로 길게 금발을 내리고 있었는데, 투르곤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렸다. 아이가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렇게 반복해서 노내를 부르고 나서, 글로르핀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길이 잠잠해졌다. 


투르곤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막 잠이 든 모양이었다. 찌푸리고 있던 미간이 조금은 풀려있었다. 움직이면 다시 깰까 싶어 그도 뒤로 등을 기대었다. 의자 위에 앉아있던 게 다행이었다. 그도 투르곤이 깨어나지 않은 며칠동안 푹 자지 못해서 눈을 감기가 무섭게 단잠이 쏟아졌다. 화로에서는 꺼지지 않고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섬세하게 쓰고 싶은 부분이 많았는데 인내심의 한계란 슬픕니다. 헬카락세는 이제 그만 건드리고 싶습니다.

Posted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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