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돌린 영주 관련 동인 설정 주의

 

 

[실마릴리온/글로르핀델x투르곤] shall we dance?

 

 

네브라스트의 비냐마르 왕궁에서는 화려한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왕인 투르곤에게 무도회 같은 걸 여는 취미는 없었지만, 영주인 두일린과 로그가 왕을 부추긴 탓이었다. 씩씩한 놀도르 여성들만 보다가 가녀린 신다르 여성들을 보니 마음이 뛰었다나 뭐라나. 무도회가 열리게 되면 춤이라도 추면서 말을 붙여 보겠다는 미혼인 영주들의 해맑은 부탁에 마음 약한 왕은 그러마 하고 대답을 했다.

 

펜로드가 국고를 그렇게 허투루 낭비할 셈이냐고 나무랐지만, 갈도르가 가끔은 무도회 같은 것도 좋지 않냐며 그가 화를 내려는 것을 말렸다. 결국 영주들은 에갈모스의 사재에서 식대를 충당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아치 가문의 영주인 에갈모스는 왕 다음가는 부자로 놀도르와 신다르, 팔라스림 사이의 무역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 에갈모스에게 불똥이 튄 것은 펜로드의 말에 고작 그 정도 가지고 뭐가 무리가 되냐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에갈모스 공께서 도와주시겠다는 겁니까?"

 

싱긋 웃는 펜로드에게 엉겁결에 대답을 한 에갈모스는 예산을 잡고 보니 상상보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것에 놀랐지만,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부유한데다가 너그러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에 관련된 일에는 빠삭한 편이라 할 수 있었지만, 뭐든 금세 잊어버리는 통에 주변인들은 그를 상당히 편하게 대했다.

 

아무튼 투르곤이 네브라스트에 정착한 이후로 처음으로 비냐마르 궁정에 활기가 넘쳤다. 시끄러운 일을 좋아하지 않는 왕 때문에 간간히 들려오는 분수 가문의 피리 소리를 제외하면, 보통 궁 안이 시끌벅적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껏 차려입은 영주들이 차례로 무도회장으로 들어올 때마다 다른 요정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만에서부터 핀골핀 가문을 따라 망명길에 오른 여덟 명의 영주는 투르곤이 네브라스트로 올 때 왕을 따라 자신의 가문을 이끌고 왔다. 그들은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갈도르, 에갈모스, 글로르핀델, 펜로드, 엑셀리온, 로그, 두일린의 순이었다. 무역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에갈모스와 왕 대신 업무를 보고 있는 갈도르를 제외하고 여섯 명의 영주들이 무도회에 참여했다.

 

무도회의 시작은 왕과 왕의 외동딸인 이드릴 공주의 춤으로 시작되었다. 금발의 이드릴은 왕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딸이었다. 어깨에 팔랑거리는 소매가 있는 분홍색의 드레스는 허리에서부터 흰색 프릴이 층층이 달려 있었다. 진한 분홍빛이 공주의 화려한 금발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평소에는 맨발로 다녀 은빛발이라는 뜻의 켈레브린달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오늘은 큼직한 리본이 달린 흰색 공단 구두를 신고 있었다. 길게 내려오는 드레스 덕분에 구두 끝에 달린 리본만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 저랑 한 곡 더 추시겠어요?"

 

아버지인 투르곤이 한 편에 놓여있는 의자에만 앉아있자, 보다 못한 이드릴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왕이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왕국 제일의 장신이었기 때문에 선뜻 춤을 추자고 나서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는 공주의 금발은 무척이나 탐스럽고 우아하게 보였다. 잠시 딸의 얼굴을 바라본 투르곤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우리 이타릴데와 춤추고 싶어 하는 요정들이 많을 텐데 내가 방해할 수는 없지."

 

그는 딸을 소중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품 안에서 키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의 부모가 자식들을 자유롭게 키웠기 때문이었다. 방임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 주었다. 백부인 페아노르가 자식들을 다소 억압적으로 키우는 것과 달리 핀골핀은 잘못된 일에는 확실하게 야단을 치지만, 그 외에는 크게 간섭을 하지 않았고, 투르곤도 그의 하나뿐인 딸이 원하는 대로 살게 하고 싶었다.

 

왕은 아버지를 생각해서 같이 춤을 추자고 하는 딸이 고마웠지만, 이드릴과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젊은 남자 요정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바냐르인 어머니 엘렌웨를 닮아 놀도르에게서는 보기 드문 빛깔의 금발을 가진 그녀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화사해 질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물론,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냥한 성격과 다른 이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 지혜롭기까지 해서 마음속으로 그녀를 흠모하는 이들이 많았다. 투르곤의 말에 이드릴은 드레스를 양 손으로 살짝 들어 올려 인사를 하고는 총총걸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릿세, 나랑도 한 곡 추면 안 되겠니?"

 

대신에 투르곤은 그의 곁을 지나가던 누이를 붙잡았다. 그녀는 영주들과는 한 번씩 춤을 추었지만, 아직 그와는 한 곡도 추지 않았다. 아레델은 하나밖에 없는 왕의 누이였고, 아버지가 있는 히슬룸이 아니라 왕을 따라 네브라스트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불행한 일 때문에 안주인이 없는 왕궁에서 그녀는 가장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그런 자각은 거의 없었다. 투르곤의 부탁에도 그녀는 새침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싫어. 오빠는 키가 커서 고개 아프단 말이야."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옷이 너무 파인 것 같은데."

 

아레델은 은색의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체 부분은 작은 다이아몬드들을 촘촘하게 박아 넣어 굉장히 눈이 부실 정도였다. 드레스는 등이 전부 드러난 것도 모자라 옆트임이 허벅지 위쪽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녀를 보자 투르곤은 혹시라도 흑심을 품는 자들이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감히 왕의 누이를 건드릴 이는 없었겠지만, 그는 정말로 아레델을 아끼기 때문에 염려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빠가 내 아버지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이게 더 편하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오라버니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레델은 춤을 추는 것보다는 사냥을 나가는 게 좋았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무도회에 참석해 달라는 왕의 간곡한 부탁에 어쩔 수 없이 무도회장에 있는 것이었다.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휙 돌아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레델은 아래로 늘어뜨리던 검은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땋아서 동그랗게 말아 올렸고, 머리에는 큼지막한 백합꽃 모양의 머리핀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로그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누이가 가버리자 왕은 다시 의자에 걸터앉았다.

 

"폐하, 이릿세님께 버림받으신 겁니까."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의자에 앉아서 제각기 춤을 추는 백성들을 바라보던 왕에게 금발의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여덟 영주 중 한명인 글로르핀델이었다. 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무장에서 그가 무술 솜씨를 뽐낼 때면, 몰래 들어오려고 하는 소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혼자서 돌아다니는 게 이상했다.

 

"그대야말로 왜 여기 있습니까? 아마 황금꽃 가문의 영주와 춤을 추려는 여성들이 줄을 서 있을 텐데."

"엑셀리온에게 맡겨두고 왔지요. 그 친구도 제법 인기가 좋으니까요."

 

그는 분수 가문의 영주인 엑셀리온과 가장 친했다. 단정한 외모에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엑셀리온의 주위에는 항상 따르는 여성들이 많았다. 영주의 말에 투르곤은 쿡 웃음을 터트렸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무도회가 시작되자마자 엑셀리온과 글로르핀델의 주변을 빙 둘러싸고 여자 요정들이 모여들었지만, 글로르핀델은 능청스레 웃으며 빠져나왔을 것이다. 엑셀리온도 이런 자리를 즐기지는 않았지만, 눈앞에서 남들에게 모진 소리를 하지는 못하는 성격이라서 지금까지 글로르핀델을 대신해 붙들려 있을 게 뻔했다.

 

"상대도 없으신 것 같은데 그럼 저랑 한 곡 추시겠습니까?"

 

글로르핀델이 갑자기 왕의 손을 잡더니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왕을 향해 반짝거리는 푸른 눈이 마치 소년과도 같았다. 하지만 투르곤은 손을 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습니다. 장난을 치려는 생각이면 그만 두세요."

 

계속 그의 곁에 있다가는 분명 그에게 휘말리게 될 게 뻔했다. 왕은 그가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도 그와 함께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백성들이 빤히 보고 있는 앞에서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걱정되면, 남들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갈까요?

 

글로르핀델은 왕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은 것처럼 왕의 팔을 잡아서 데리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왕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런 식으로 또 끌려 나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뒤돌아서서 다른 이들에게 향하려던 투르곤을 글로르핀델이 잡아끌었다.

 

"아직 무도회가 끝나려면 한참입니다. 폐하께서도 조금은 즐거우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걷는 방향으로 보아 글로르핀델은 정원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홀과는 조금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흰색의 자두꽃 붉은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정자가 있었다.

그곳까지 걸어가면서 팔을 붙잡은 손의 힘이 점점 세어져서 마침내 왕의 입에서 작게 비명이 나왔다.

 

"아, 아파. 글로르핀델."

"이제야 이름을 불러주시네요."

 

투르곤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사내가 기둥 쪽으로 왕을 몰아세웠다. 등이 딱딱한 기둥에 닿자 왕이 살짝 움찔했다. 글로르핀델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고, 오히려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망설이던 왕이 입을 열었다.

 

"글로...읍..."

 

하지만 하려던 말은 갑자기 다가온 사내의 입술에 의해 막혀버렸다. 글로르핀델은 왕이 말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입술이 떨어질 만하면, 다시 방향을 바꾸며 입맞춤을 계속했다. 농밀한 입맞춤이 계속되다가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하아..뭐, 뭐하자는 겁니까!"

 

숨을 크게 내쉬고 나서도 말까지 더듬거리는 투르곤의 얼굴을 빤히 보던 글로르핀델이 그제야 얼굴에 부드럽게 미소를 띠웠다. 그가 손으로 흐트러진 왕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고스란히 입술을 빼앗기고 나서야 소리를 지르는 상대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조금만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남들 앞에서도."

 

투르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그가 다시 왕의 입술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데었다 떼었다. 주위에 다른 이가 없을 때는 이리 귀여운데 남들 앞에만 서면 왕으로 돌아가 버리는 투르곤이 때로는 조금 원망스러웠다.

 

"부끄러워서 그러시는 건 알고 있는데, 자꾸 이런 식이면 저도 기분이 상합니다. 춤 한 번 추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전 춤에는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 잘 추지도 못할 뿐더러 그대의 발을 밟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이릿세 공주님께는 왜 추자고 하셨습니까?"

 

되도 않을 변명을 하는 투르곤에게 글로르핀델이 왕의 누이를 들먹였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왕은 다소 억울한 듯 했다. 사내 둘이서 남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함께 춤을 추자고 권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동생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대와 춤을 추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리 이상하겠습니까. 폐하도 제법 고우신 걸요. 공주님들께 뒤지지 않을 정도로."

"허튼 말씀은 하지도 마세요. 하물며 저는 여자들처럼 춤추는 법도 모릅니다."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닌데요? 그리고 춤이라면 제가 친절하게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여긴 것인지 왕이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글로르핀델은 왕의 뺨을 쓸어내리더니 다시 손을 붙잡았다. 여인들의 손을 잡고 춤을 춘 적은 손꼽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이제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었다.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제 왕과 춤 한 번 추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얌전하게 저를 따르지 않으시면, 침대 위에서 춤을 추게 해 드리는 수가 있습니다."

"알겠으니까 그만 놀리시죠. 남이 들을까 겁납니다."

 

글로르핀델이 왕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왕의 키가 조금 더 큰 편이었지만, 그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어서 함께 춤을 추는 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깨에 얹지 않은 다른 손으로 왕과 깍지를 낀 채, 한참을 빙글거리며 후원을 맴돌다가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투르카노, 저랑 매일 연습 좀 해야겠습니다. 공주님과 출 때는 제법 추시더니, 공주님이 잘 추셨던 거군요."

"제가 못 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만 하시죠. 벌써 한참 추지 않았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오늘처럼 입어요, 잘 어울리니까."

 

왕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좋아하지 않아 대개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왕의 의복이 수수해봤자 얼마나 수수하겠냐마는 무도회에서 입고 있는 예복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흰 옷에 금박 장식이 되어 있는 옷은 소매가 길게 늘어지지만, 몸통부분은 몸에 꼭 맞았다. 예복은 투르곤의 늘씬한 육체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글로르핀델의 칭찬에 왕이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럼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가 투르곤의 손을 잡고 등을 돌렸지만, 왕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 들어가실 겁니까? 밖에 더 있을까요?"

마지못한 글로르핀델이 왕을 돌아보자 뺨에 부드러운 것이 스쳤다.

 

"일부러 상대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소근거리는 목소리가 얼마나 작았던지 바로 앞에 있는 글로르핀델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춤을 추는 백성들을 보고 있는 것도 크게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있으려니 조금은 답답했다. 그래도 왕이 직접 무도회를 개최한 이상 도중에 자리를 비우기는 곤란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방으로 가서 책이라도 읽고 있었을 게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르핀델은 자신의 뺨에 입술을 맞춰 온 왕이 귀여워서 견디지 못하겠다 듯 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와락 부둥켜안았다. 그저 자신의 왕이 사랑스러워서 품에서 떼어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긴 왕도 얌전히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흔한 설정이지만 제가 보고 싶으니 썼습니다.

Posted by ♡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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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골핀+글로르핀델)

썰들 2014. 3. 21. 10:20

태양의 1시대 20년 경(히슬룸, 바라드 에이셀)

 

 

(핀골핀+글로르핀델)

 

 

핀골핀 왕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생각했을 때, 방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황금꽃 가문의 영주인 글로르핀델이었다. 아직 환복을 하지도 않아서 바로 들어오라 일렀다. 모습을 드러낸 금발 머리의 청년은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그만큼 그는 앙과 허물없는 사이였다. 이 땅에 오기 전부터 친형제처럼 지내서 종종 이런 식으로 만나기도 했다.

 

"네브라스트로 갈 생각이라 들었다."

 

히슬룸에 지내던 핀곤과 투르곤, 아레델은 각각 도르로민과 네브라스트로 향할 예정이었다. 먼저 핀골핀의 큰아들인 핀곤이 얼마 전에 도르로민으로 떠났고, 이제 작은 아들과 고명딸이 네브라스트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투르카노를 따라 갈 생각입니다."

 

글로르핀델은 왕의 앞인데도 스스럼없이 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이였다면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핀골핀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리 일렀는데도 둘이 있을 때면 아만에서 친근하게 부르던 버릇이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없는 자리라서 일단 넘기기로 했다.

 

"그래, 너는 늘 그 아이를 친형제처럼 아꼈으니까."

"하여 서운하십니까?"

 

금발의 청년은 왕의 얼굴을 살폈지만, 핀골핀의 얼굴에 별로 섭섭하다는 기색은 없었다. 왕은 크게 웃거나 크게 슬퍼하는 일이 없었고, 대개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로르핀델의 마음만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괜히 심통이 나서 자신이 볼을 살짝 부풀린 것도 몰랐다.

 

"아니다. 너라면 믿을 수 있지. 장난기만 좀 가라앉히면 괜찮을 텐데."

 

곧 핀골핀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떠올랐다. 왕의 앞에서 저런 얼굴을 보이는 글로르핀델이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커버렸는데도 가끔은 부산스레 뛰어다니던 금발의 소년이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대왕께는 제가 아직도 어린 소년으로 보이시나 봅니다."

 

그런 왕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글로르핀델이 작게 키득거렸다. 청년이 어렸을 때부터 핀골핀은 이미 성년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은 귀여운 막냇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지도 몰랐다.

 

"넌 내 동생보다도 어리니 당연하잖느냐."

"그야 그렇지요. 아마도 네브라스트로 떠나면 당분간 찾아뵙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핀골핀의 말을 능청스레 넘긴 글로르핀델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마치 소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투르곤을 따르기로 한 여덟 명의 영주 중 한명이었다. 그가 맡을 일이 그리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겠지.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많을 거다."

 

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쩌면 상당히 오랫동안 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했다.

 

"아라카노. 제가 당신의 가문을 따라 망명을 떠난 것과 당신의 아이들을 아끼는 건, 당신을 경애하기 때문입니다."

 

간만에 들어보는 이름에 왕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글로르핀델의 부모들은 아만을 떠나지 않았고, 그만이 핀골핀 가문을 따라 가운데 땅으로 오게 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핀골핀 가문에 애착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투르카노는 왕을 많이 닮았습니다."

 

큰 아들인 핀곤보다도 핀골핀의 차분한 외모와 성품은 작은 아들인 투르곤이 많이 물려받았다.

 

"내 아들이니 당연히 나를 닮았겠지."

"제가 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왕을 보는 것 같아서 자꾸 눈길이 갑니다."

 

비록 장성한 모습 밖에 보지 못했지만, 글로르핀델은 왕의 어린 아들을 볼 때면, 가끔씩 어린 시절의 왕도 저러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다. 투르곤처럼 집 안에 머무르기 보다는 밖에 나가기는 했겠지만, 책을 넘기는 진지하면서도 어린 눈망울에서 핀골핀의 어린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쓸데없는 말이 더 많구나."

"대왕은 강한 분이시고, 제가 곁에서 지켜드리지 않아도 괜찮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떠나게 된 겁니다."

 

이복형제인 페아노르처럼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글로르핀델에게 왕은 누구보다 강한 자였다. 굳건하고, 다른 이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의지가 되는 군주였다.

 

"잘 생각했다. 나는 걱정할 것 없어. 투르카노나 잘 챙겨주거라. 그 녀석이 말은 안 해도 빙하에서 제 아내를 잃은 뒤로 추운 이 땅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따뜻한 서쪽 해안으로 가는 건 잘 된 일이다."

 

온화했던 서쪽 땅과는 다르게 핀골핀의 무리가 정착하게 된 히슬룸은 겨울이 되면 상당히 추워졌다. 겨울이 시작되려 하면, 투르곤은 외투로 몸을 꽁꽁 감싼 채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녕히 지내십시오. 나의 왕이시여. 아라카노의 늠름한 모습을 한동안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아쉬운데요?"

"또 그런 소릴. 엉뚱한 소리는 그만하고 빠트린 것이 없는지 다시 잘 살펴보거라. 미리 길을 다 봐 두었다고 하더니 막상 숲에 들어가서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느냐."

 

글로르핀델은 아는 길이라고 하면서 핀골핀을 엉뚱한 길로 가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번 숲 속을 헤매면서 소년에게 뭐라고 하려다가도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달아나 버려 곤란했던 핀골핀이었다.

 

"옛날 얘기입니다. 왕이야말로 이릿세와 산책을 나가셨다가 저와의 약속을 잊으신 적도 있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딸애가 워낙 이리저리 뛰어다녀서 그렇지."

 

핀골핀의 고명딸인 아레델은 남자 형제들 못지않게 활기찼고, 아이의 뒤를 쫓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글로르핀델과 사냥을 가기로 약속했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생각이 난 적도 있었다.

 

"하하, 여전하십니다. 곤란한 표정의 대왕을 보는 건 늘 재미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못된 버릇이야. 참으로 건방진 영주일세."

 

글로르핀델의 말에 핀골핀이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짓자 그가 해사하게 웃었다. 엄숙한 얼굴이 청년의 말에 흐트러질 때면, 실로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핀골핀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약간의 웃음기가 배어있었다.

 

"버릇없는 글로르핀델은 이만 물러가 보지요. 떠나기 전에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투르카노를 너무 놀리지는 말고, 내색은 안 해도 생각보다 섬세한 아이니까."

 

계속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은 글로르핀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핀골핀은 혹시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짓궂게 굴지 않을까 주의를 주었다.

 

"명심하도록 하도록 하지요. 왕의 아드님인데 제가 잡아먹기야 하겠습니까."

"입버릇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겠구나. 영주라는 자가 그렇게 경박해서야 되겠느냐."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평소의 핀골핀을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글로르핀델과의 격의 없는 대화에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그 정도로 둘 사이는 가족처럼 친밀하게 보였다. 험한 빙하 속을 함께 헤쳐 나와 더 그랬을지도 몰랐다.

 

 

제안의 설정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두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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